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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384
한자 河陽縣
영어공식명칭 Hayang-hyeon
이칭/별칭 하주,화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018년연표보기 - 하주를 하양현으로 개칭
개정 시기/일시 1601년 - 하양현을 대구부에 합속
개정 시기/일시 1607년 - 하양현을 대구부에서 복현
폐지 시기/일시 1895년 6월 23일 - 하양현을 하양군으로 개칭

[정의]

1018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하양현(河陽縣)은 고려 초 하주(河州)였다. 1018년(현종 9) 하양으로 개칭하고 현이 되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와촌면진량읍 북부 지역, 그리고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괴전동·동내동·매여동·신서동 일대를 관할하였다. 고을 이름인 ‘하양’은 금호강이 굽이쳐 흐르는 북쪽에 자리한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하양은 ‘화성(花城)’이라고도 불렀다. ‘화(花)’는 꽃으로서 옛말로 ‘곶(串)’이었다. 즉, 바다로 땅이 불쑥 튀어나온 곳을 일컫는 ‘곶’과 같이 ‘물’[금호강]이 흐르다가 이루어진 땅에 마을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별칭으로 ‘화성’, 즉 ‘꽃[곶]성’이라고도 불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는 1018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읍명 변경과 속현(屬縣) 조정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 초에 설치된 하주하양현으로 개칭되고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관련 기록]

하양현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설치 연혁 및 관원, 임내(任內) 등이 소개되어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임진왜란 직후의 치폐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양군으로의 개칭은 1895년 5월 26일[음력] 반포된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의거한 것이다. 그 외에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화성지(花城誌)』 등에 하양현의 연혁과 현황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신증동국여지승람』 하양현 편의 고적(古跡)조에 따르면, 하양현은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이지부곡(貍只部曲)·안심소(安心所)·이지폐현(梨旨廢縣)을 임내로 두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의 점진적인 면리제(面里制) 실시로 하양현의 임내도 면리로 개편되었다. 1789년(정조 13)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는 7면 32리, 19세기 초반의 『경상도읍지』에는 7면 35리가 확인된다. 인구의 경우 15세기 초반에는 2,686명[안심소 530명]이었는데, 1789년에는 7,079명, 1870년에는 7,525명으로 증가하였다.

전결의 경우 15세기에 간전(墾田) 2,216결, 수전(水田) 738결이었다. 1831년에는 한전(旱田)이 1,713결 65부 2속, 수전이 844결 9부 2속으로 소폭 증가하였다. 수리시설은 15세기에 15개의 제언(堤堰)이 있었으나, 19세기에는 9개소만 확인된다. 하양현금호강을 끼고 있는데다 평지에 위치해 있어, 천방보다 평지에 물을 가두어 둘 수 있는 못[池]을 우선적으로 확충했기 때문이다. 다른 제언 규모가 평균 500~700척인데 비해, 하양의 토산지(吐山池)가 약 4,400척, 다문리지(多文里池)가 약 2,100척에 이르고 있다는 점은 이 지역 수리 관개 사업의 특수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하양현의 대표적인 토산·공물로는 대추와 종이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하양 대추는 여러 고을 가운데서도 제일이라고 하였다. 종이의 경우 하양현의 대표 사찰인 환성사(環城寺)에서 제작을 담당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하양현의 토성(土姓)으로는 허(許)·현(玄)·제(諸)·유(兪)씨가 있으며, 속성으로는 경주에서 온 김(金)씨가 있었다. 안심소(安心所)에는 토성으로 전(全)·신(申)·김(金)·박(朴)·허(許)·노(魯)씨가 있었다. 이들 토성 세력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하양현 지역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하양 허씨(河陽許氏)를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 이후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가문은 없다. 대신 타관(他貫) 출신의 가문들이 조선 시대 하양 지역를 주도하게 된다.

『교남지(嶠南誌)』에는 하양현의 인물로 문과 5명, 무과 3명, 생원·진사 4명, 음사 6명, 충의 7명, 문사 12명 등 37명을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하양 허씨·청도 김씨(淸道金氏)·영천 이씨(永川李氏)·김해 김씨(金海金氏)·장수 황씨(長水黃氏)·동래 정씨(東萊鄭氏)·성주 도씨(星州都氏)·인천 채씨(仁川蔡氏)·경주 김씨(慶州金氏)·파평 윤씨(坡平尹氏)로서 조선 후기 하양현을 대표하던 가문으로 이해된다.

그 외에도 17세기 이래 다수의 관원을 배출한 창녕 조씨(昌寧曺氏),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을 했던 신해(申海)의 평산 신씨(平山申氏)와 박능정(朴能精)·박붕(朴鵬) 부자의 울산 박씨(蔚山朴氏)가 활약하였다.

[변천]

하양현은 1018년 경주의 속현이 되었지만, 고려 정부의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12세기 이후에는 감무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때 안심소도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인 1413년(태종 13) 대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으로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고을이 피폐해져 1601년(선조 34) 대구부(大丘府)에 병합되었다가, 1607년(선조 40) 복현(復縣) 되었다. 1715년(숙종 41) 현감 이의장(李宜璋)이 현청을 남쪽으로 5리 떨어진 천천면(泉天面)[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도리리]으로 옮겼다. 이어 1742년(영조 18)에는 현감 남원명(南遠明)이 기존 위치에서 1리 떨어진 곳으로 관아를 옮겼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음력] 제2차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반포된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따라, 1895년 윤5월 1일[양력 6월 23일] 부로 기존 8도 체제를 23부 체제로 개편하고,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부와 군으로 이원화하면서 전국이 23부 337군 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하양현은 23부 가운데 대구부(大邱府) 소속의 하양군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하양현의 존재 과정은 중세 지방 행정제도의 특징과 변화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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