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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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牙山 蔣氏 |
영어공식명칭 | Asan J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기원 |
[정의]
장서를 시조로 하고 장흥부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개설]
아산 장씨는 충청남도 아산시를 관향으로 하는 경산 지역의 세거 성씨이다. 경산 지역 아산 장씨는 조선 시대 중기 이후 번성하여 향교의 교임을 역임하는 등 경산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달성 서씨, 초계 정씨, 청주 한씨와 함께 경산의 4성으로 꼽히기도 한다.
[연원]
아산 장씨의 시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장서(蔣壻)이다. 장서는 송나라에서 관직을 지냈는데, 금나라가 송을 침공하자 항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송나라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로 망명하였다. 고려 조정은 장서를 받아들이며 충청도 아산 지역 일부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아산군(牙山君)에 봉하였다. 이후 장서는 아산에 정착하여 아산 장씨의 시조가 되었고, 후손들은 각지로 이거하였다.
[입향 경위]
아산 장씨 경산 지역 입향조는 조선 초 동래첨사(東萊僉使)를 지낸 10세 장흥부(蔣興膚)이다. 장흥부는 경상도 의성에 살다가 경산 지역 토성인 옥산 전씨와 혼인한 뒤 처가가 있는 경산으로 입향하였다. 장흥부는 장문도(蔣聞道)·장방도(蔣方道)·장유도(蔣有道) 3형제를 두었는데, 장문도의 후손들은 경주·울산·양산 등지로 이주하였고, 장유도는 후손을 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경산 지역의 아산 장씨는 장방도의 후손들이다.
장방도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군자감(軍資監)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후 장방도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14세 장자원(蔣自元) 대에는 경산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5세 장광정(蔣光廷)은 고산, 16세 장유인(蔣裕仁)은 내환, 장유신(蔣裕信)은 시지에 정착하였으며, 신매·가천 일대에서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이 일대는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편입되었으나, 아산 장씨 일문은 근대까지 경산 지역 유림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번창하였다.
[현황]
아산 장씨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산시에 864명이 거주하고 있다. 아산 장씨 집성촌이었던 옛 경산군 고산면이 1981년에 대구직할시 수성구로 편입되는 행정 구역 변경이 이루어져 경산시에는 집성촌이 없다.
[관련 유적]
아산 장씨 관련 유적으로는 덕산재(德山齋)가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에 있으며, 장자원(蔣自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재실이다. 장자원은 사헌부 감찰 장간(蔣芉)의 아들로, 자는 성인(性仁), 호는 덕봉(德鳳)이다. 생원시에 급제하여 한성참군을 지냈다. 효행에 힘썼으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시문 이외에 산수도 즐겨 그렸다. 대덕산 기슭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가꾸었다고 한다.
재실 중수기에 의하면 덕산재는 1740년(영조 16)에 해붕공(海鵬公)이 종족의 서당으로 지어 ‘곡계정사(曲溪精舍)’라 편액하였다. 이후 ‘이로재(履露齋)’로 개칭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대흥동으로 이건한 뒤 ‘덕산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7년에 지금의 위치인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 75번지로 이건하였고, 1978년 중수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