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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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溪 鄭氏 |
영어공식명칭 | Chogye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기원 |
입향 시기/일시 | 1356년 - 초계 정씨 정연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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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375년 - 정연 사망 |
본관 | 초계 -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
입향지 | 경상북도 경산시 상방동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협석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대명리 |
성씨 시조 | 정배걸 |
입향 시조 | 정연 |
[정의]
정배걸을 시조로 하고 정연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개설]
초계 정씨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을 관향으로 하는 경산 지역의 세거 성씨이다. 경산 지역에는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에 향교의 임원을 역임하며 경산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졌다.
[연원]
초계 정씨의 본관인 초계(草溪)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이다. 삼국 시대에는 신라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초계(草溪)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 합주(陜州)[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이후 조선 말까지 군으로 존속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합천군에 합쳐져 초계면이 되었다. 초계 정씨의 시조는 정배걸(鄭倍傑)이다. 정배걸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문종 때 예부 상서·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또한 사학(私學)인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도 힘썼다. 홍문공도는 사학 12도(十二徒) 중 하나로, 문헌공도(文獻公徒)와 함께 크게 번성하였다. 정배걸이 초계군(草溪君)에 봉하여진 것을 계기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갔다.
[입향 경위]
초계 정씨는 고려 말부터 경산 지역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초계 정씨 경산 입향조는 양헌공(良獻公) 정연(鄭珚)[?~1375]이다. 정연은 고려 충혜왕 때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서연시독관(書筵侍讀官)이 되었다. 충목왕 때는 팔도의 토지를 측량하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에 임명되어 평양 지역 민전을 측량하고,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를 겸직하였다. 공민왕 때는 우복야(右僕射), 강릉교주도지휘사, 판개성부사, 밀직제학을 역임하고 팔천군(八川君)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청주목사로 재임하던 1356년(공민왕 5)에 인척인 채하중(蔡河中)의 역모죄에 연루되어 지금의 경산시 사동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연은 국운이 쇠한 것을 한탄하며 경산시 상방동 동산(東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이후 정연의 후손들은 경산 지역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현황]
초계 정씨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산시에 1,043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천면 협석리와 대명1리 등에 집성촌이 있다.
[관련 유적]
초계 정씨 관련 유적으로는 동산서당(東山書堂)을 들 수 있다. 동산서당은 정연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사우로,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협석리에 있다. 동산서당은 원래 1814년(순조 14)에 동산사(東山祠)라는 이름으로 경산시 상방동에 세워졌는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후 1938년에 남천면 협석리로 옮겨 동산서당을 새로 세웠다.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