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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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 李氏 |
영어공식명칭 | Youngcheon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은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기원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76년 - 이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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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7세기 전반 - 영천 이씨 이간 입향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이간 사망 |
본관 | 영천 - 경상북도 영천시 |
입향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은호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은호리 |
성씨 시조 | 이문한 |
입향 시조 | 이간 |
[정의]
이문한을 시조로 하고 이간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개설]
영천 이씨는 경상북도 영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경산 지역의 세거 성씨이다. 영천 이씨의 시조는 이문한(李文漢)이고, 경산 지역 입향조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이간(李幹)[1576~1637]이다.
[연원]
영천 이씨의 본관인 영천은 경상북도 남동쪽에 자리한 지역으로, 초기 국가 시대에 골벌국(骨伐國)이 있던 곳이다. 신라가 점령한 이후 영천시 일원에는 절야화군(切也火郡)과 사정화군(史丁火郡)을 두었다. 경덕왕 때에는 절야화군과 사정화현이 각각 임고군(臨皐郡)과 신녕현(新寧縣)으로 개칭되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하다가 고려 초에 임고군과 인근에 있던 임천현(臨川縣)·도동현(道洞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를 신설하였다. 이후 조선 초인 1413년(태종 13) 영주군이 영천군으로 개칭되며 ‘영천’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신녕현은 약간의 부침을 거듭하며 고려·조선 시대 동안 현으로 존속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에 영천군에 흡수되었다. 1937년에는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81년에는 영천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되었다.
영천 이씨의 시조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이문한이며,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하여진 이대영(李大榮), 울산군사(蔚山郡事) 이중영(李仲榮), 영동정(令同正) 이박(李磚)을 각각 파조로 하는 3개 계통으로 나뉜다. 고려 때 인물로는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에 오른 이인(李仁)과 이당(李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한 이국보(李國寶)가 유명하며, 조선 시대 인물로는 이종검(李宗儉), 이보흠(李甫欽), 이현보(李賢輔) 등이 유명하다.
이종검(李宗儉)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 직제학,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올랐다. 이보흠(李甫欽)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를 지냈는데, 세조 때 순흥부사(順興府使)로 있으면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현보(李賢輔)는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교서관(校書館),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입향 경위]
영천 이씨 경산 지역 입향조는 이간이다. 이간은 종사랑(從仕郞) 이개신(李介臣)과 월성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직(公直)이고, 호는 괴암(乖庵)이다. 이숙량(李叔樑)의 문인이다. 1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에서 의병을 모아 적과 싸워 영천성을 방어하였다. 그 후 청송 안덕리로 이사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며 조형도(趙亨道)·권익(權翊) 등과 교유하였다. 40세인 1615년(광해군 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더 이상 과거에 응하지 않고 낙향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중단하였다. 이후 하양 임호(臨湖)로 이사하였다.
[현황]
영천 이씨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산 지역에 3,062명이 거주하고 있다. 하양읍 은호리를 중심으로 영천 이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관련 유적]
영천 이씨 관련 유적으로는 이간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임호서원(臨湖書院)이 있다. 소재지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은호리 101번지이다. 1823년(순조 23) 임호사(臨湖祠)로 건립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19년 임호사가 있던 자리에 유허비각을 건립하였고, 1934년에는 지금의 위치인 은호리 마을 안으로 이건하여 임호서당을 세웠다. 1977년에 임호서당을 강당으로 하고, 사당을 추가로 세워 ‘임호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