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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許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64
한자 許稠
영어공식명칭 Heo Jo
이칭/별칭 중통(仲通),경암(敬菴),문경(文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69년 4월 11일연표보기 - 허조(許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90년 - 허조(許稠)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92년 - 허조(許稠) 봉상시승 지제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00년 - 허조(許稠) 사헌부 잡단 임명 및 완산 판관 좌천
활동 시기/일시 1403년 - 허조(許稠) 영월 군수로 좌천
활동 시기/일시 1408년 - 허조(許稠) 춘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411년 - 허조(許稠) 예조 우참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15년 - 허조(許稠) 예문관 제학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16년 - 허조(許稠) 예조 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22년 - 허조(許稠) 이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3년 - 허조(許稠) 『속육전』 편수 참여
활동 시기/일시 1426년 - 허조(許稠) 이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8년 - 허조(許稠) 판중군도총제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0년 - 허조(許稠) 『오례의(五禮儀)』 편찬
활동 시기/일시 1432년 - 허조(許稠) 이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6년 - 허조(許稠) 예조 판서 겸임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허조(許稠) 우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허조(許稠) 좌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39년 12월 28일연표보기 - 허조(許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39년 - 허조(許稠) 시호 문경(文敬) 증시
추모 시기/일시 1452년 - 허조(許稠) 세종 묘정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84년 - 허조(許稠) 금호서원 제향
추모 시기/일시 1790년 - 허조(許稠) 금호서원 사액
묘소|단소 허조[許稠] 묘소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2리 42
사당|배향지 허조[許稠] 배향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가마실길2길 32-1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하양
대표 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전기 하양이 관향인 문신.

[개설]

허조(許稠)[1369~1439]는 조선 초기 태조·정종·태종·세종 연간 여러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특히 왕조의 예제(禮制)와 법전 정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과 더불어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꼽힌다.

[가계]

허조의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할아버지는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지낸 허윤창(許允昌),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허귀룡(許貴龍), 어머니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길(李吉)의 딸이다. 형제로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허주(許周),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허척(許倜)이 있다. 부인은 영해 박씨(寧海朴氏)로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박경(朴經)의 딸이다. 아들은 형조 지사(刑曹知事)를 지낸 허후(許詡)와 사온서령(司醞署令)을 지낸 허눌(許訥)이 있다. 세 딸을 두었는데 사위는 세자시강원 좌필선(世子侍講院左弼善) 최유종(崔有悰),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 정잠(鄭箴), 우정언(右正言) 윤미견(尹彌堅)이다. 허조하양 허씨 문경공파의 파조(派祖)로 추숭되고 있으며,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의 금호리·부호리와촌면 용천리 일대에는 허조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허조(許稠)는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1390년(공양왕 2) 문과에 합격하여 전의시승(典儀寺丞)에 임명되었다. 조선 건국 후 좌보궐 지제교에 임명되었다가, 곧 봉상시승 지제교로 옮겼다. 1393년(태조 2)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하였는데, 『주자가례』에 따라 상례(喪禮)를 행하였다. 1397년(태조 6) 성균관 전부(成均館典簿)에 임명되어 석전의식(釋奠儀式)을 정리·간행하였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한 후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에 임명되었는데, 왕의 뜻을 거스린 일이 있어 완산 판관(完山判官)으로 좌천되었다. 1402년(태종 2) 이조 전랑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영월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405년(태종 5) 세자시강원 좌문학을 겸직하였다. 1407년(태종 7) 세자가 명나라에 사행 갈 때 서장관에 임명되어 동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으며, 귀국 중에 들렀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文廟)에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배제하였다. 1408년(태종 8) 양평군 조대림(趙大臨)의 옥사에 연루되어 춘천으로 귀양 갔으나, 곧 사면되어 경승부 사윤에 제수되었다. 의례상정소의 제조를 지내면서 당송(唐宋)의 고전을 원용하여, 조정과 종묘의 예악, 사서인(士庶人)의 상제(喪制)를 찬정(撰正)하였다. 또한 4부 학당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14년 평안도의 산성을 순시하였으며, 1416년(태종 16) 예조 참판에 제수되어 봉상시 제조를 겸임하였다. 이때 경기도의 요역이 번다함을 지적하며 감해줄 것을 청하고, 왕의 수렵을 자제해 주기를 주청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 부윤(恭安府尹)과 예조 판서를 지내며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백관의 상제를 제정하였다. 이조 판서에 제수된 후에는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속육전(續六典)』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1426년(세종 8) 참찬·빈객이 되었다가 이조 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적극적으로 두둔하면서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건의해 이를 관철시켰다. 1432년(세종 14)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孝子順孫)과 충현(忠賢)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였다. 1433년(세종 15) 세종이 파저강(婆渚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토벌하고자 했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며 반대하였다. 1436년(세종 18) 예조 판서를 겸임하면서, 과거 시험에서 사장(詞章)보다는 강경(講經)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38년(세종 20) 과거 시험관을 맡으며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다. 같은 해 의정부 우의정에 올랐고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급하였다. 1439년(세종 21)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으며, 좌의정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허조는 여러 학문 중 예제에 특히 밝았다. 이에 조선 건국 후 석전의식을 비롯한 각종 예제 정비와 『속육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30년(세종 12)에는 세종의 명으로 『오례의(五禮儀)』를 편찬하였다.

허조의 유고로는 4권 2책의 『금호세고(琴湖世稿)』가 전한다. 이 책은 1863년(철종 14) 하양 지역에 세거하는 후손들이 허조(許稠)·허후(許詡)·허조(許慥) 3대(代)의 유사(遺事)를 엮어 간행한 것이다. 그 중 권1~2에 해당되는 「경암선생일고(敬庵先生逸稿)」가 허조의 유고인데, 여기에는 후손들이 허조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신도비명(神道碑銘), 언행습유(言行拾遺), 청록용후손소(請錄用後孫疎), 금호서원청액소(琴湖書院請額疎), 봉안문(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선액시 사제문(宣額時賜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허조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2리 42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39년 허조가 죽자 태상시(太常寺)에서 ‘문경’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452년(문종 2)에는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1684년(숙종 10) 하양현(河陽縣)[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세거하는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허조를 제향하기 위해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금호서원(琴湖書院)을 창건하였다. 금호서원은 1790년(정조 14) 사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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