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65 |
---|---|
한자 | 許詡 |
영어공식명칭 | Heo Hu |
이칭/별칭 | 정간(貞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조선 전기 하양이 관향인 문신.
[개설]
허후(許詡)[1398~1453]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문신으로 문종의 유언으로 어린 단종을 보필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죽임을 당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가 죄가 없음을 말하다가 거제도로 유배당하였다.
[가계]
허후의 본관은 하양(河陽),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아버지는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어머니는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박경(朴經)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영해 박씨(寧海朴氏), 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허귀룡(許貴龍), 증조할아버지는 도관 정랑(都官正郎)을 지낸 허윤창(許允昌)이며, 부인은 대사헌을 지낸 이흥문(李興門)의 딸 정숙부인(貞淑夫人) 경산 이씨(京山李氏)와 부사(府使)를 지낸 이설(李說)의 딸 정숙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 사항]
허후는 1426년(세종 8) 진사(進士)로 급제 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28년(세종 10) 병조 좌랑, 1431년(세종 13) 지평에 올랐으며, 1436년(세종 18)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1438년 승지(承旨) 재직 시 『고려사(高麗史)』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하자고 건의하였다. 1448년(세종 30)에는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1451년(문종 1)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문종은 승하하기 직전 황보인·김종서·허후에게 유언을 내려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하였다. 이후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수양대군이 고명 사은사(誥命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허후는 왕이 어리고 나라가 어수선하다는 이유로 사신 파견을 반대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이 일어나 황보인·김종서·조극관(趙克寬) 등은 죽임을 당했으나, 허후는 이전에 수양대군의 사신 파견을 반대하였다 하여, 죽임을 면했다. 황보인·김종서 등이 효시(梟示)되자, 허후는 이들이 무죄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계전(李季甸)의 모함으로 거제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교살형을 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허후의 유고로는 1863년(철종 14) 하양 지역에 세거하는 후손들이 허조(許稠)·허후(許詡)·허조(許慥) 3대(代)의 유사(遺事)를 엮어 간행한 『금호세고(琴湖世稿)』 4권 2책이 있다.
[묘소]
허후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소후면 고마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허후는 1737년(영조 13) 화암서원(花巖書院)[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괴강로 313]에 제향되었다. 1747년(영조 23) 복관(復官)이 이루어졌으며, 1756년(영조 32)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의 왕릉인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추향(追享)하였다.
1792년(정조 16) 충신으로 정려(旌閭)되었으며, 1814년(순조 14) 관향인 하양에 허후·허조부자정충각(許詡許慥父子旌忠閣)[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경로 527]이 세워졌다. 1923년 금락리금호서원(琴樂里琴湖書院)[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아낙고개길4길 25]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