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09 |
---|---|
한자 | 金仁問 |
영어공식명칭 | Kim Inmun |
이칭/별칭 | 인수(仁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삼국 시대 경산 지역에 부임한 신라 왕족.
[개설]
김인문(金仁問)[629~694]은 7세기에 활동하였던 신라의 왕족이자 정치인이며, 장수 겸 외교전략가이다. 653년[혹은 656년]에 압독주(押督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평생 동안 일곱 번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으며, 총 22년간 당과 신라 사이의 외교현안을 주도하였다.
[가계]
김인문의 자(字)는 인수(仁壽)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와 문명왕후(文明王后)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무왕(文武王) 김법민(金法敏)의 친동생이다. 문명왕후는 김유신(金庾信)의 동생 김문희(金文姬)이므로, 김유신의 외조카가 된다. 혼인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활동 사항]
김인문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유가(儒家)의 책을 많이 읽었으며, 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佛敎)에도 해박하였다. 또한 예서(隷書)와 활쏘기·말타기·향악(鄕樂) 등에 두루 능했다. 651년(진덕여왕 5)에 23세의 나이로 당에 들어가 숙위(宿衛)한 이래 총 일곱 번에 걸쳐 22년간 외교관이자 전략가로 현안을 해결하였으며, 문무왕과 당나라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신구도(神丘道) 부대총관(副大摠管)에 임명되어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정벌하였다. 이때 업적을 인정받아 태종무열왕이 파진찬(波珍湌)에 제수하고, 각간(角干)으로 삼았다. 668년(문무왕 8)에는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서 신라군을 인솔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킨 업적으로 문무왕과 당나라 고종에게 포상을 받았다. 690년(신문왕 10) 당나라 중종(中宗)으로부터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임해군개국공(臨海郡開國公) 좌우림군장군(左羽林軍將軍)에 제수되어 최고의 예우를 받기도 하였다.
화려한 국제 활동과 달리 김인문의 국내 정치 활동은 많지 않다. 653년(진덕여왕 7)에 당에 들어가 숙위하던 중 귀국하였는데, 당시 압독주 총관에 임명되어 장산성(獐山城)[지금의 용산산성(龍山山城)으로 비정]을 축조하였다는 사실이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장산성을 축조한 공로에 기뻐하여 특별히 식읍(食邑) 3백 호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다만 압독주 총관 임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인문 열전(列傳)에는 653년으로, 태종무열왕 본기(本紀)에는 656년(태종무열왕 3)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소]
김인문의 묘소는 『삼국사기』에 ‘서울의 서쪽 벌판(京西原)’이라 하였는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1006-1에 위치한 김인문묘(金仁問墓)[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로 비정된다.
[상훈과 추모]
김인문은 효소왕(孝昭王)이 695년에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