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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21
한자 張夢紀
영어공식명칭 Jang Monggi
이칭/별칭 척재(惕齋),비유장군(飛孺將軍)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장몽기 임진왜란 창의
몰년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장몽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5년 - 장몽기 선무원종공신 녹훈
추모 시기/일시 1614년 - 장몽기 병조판서 증직
거주|이주지 장몽기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장몽기(張夢紀)[?~1613]는 임진왜란 때 경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가계]

장몽기의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척재(惕齋)이다. 장몽기의 인동 장씨는 태사(太師)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都始祖), 대제학(大提學) 장계(張桂)를 중시조로 하며,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張順孫)을 파조로 삼고 있다.

[활동 사항]

장몽기는 경산 출신으로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란의 조짐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에 1592년(선조 25) 전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곽재우(郭再祐)·최동보(崔東輔)·조성(曺珹) 등과 함께 창의(倡義)한 후 향병(鄕兵)을 모집했다고 한다. 전란 중 장몽기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비유(飛孺)’라는 호를 하사하였기에 깃발에다 ‘비유장군(飛孺將軍)’이라는 표시를 하였다. 대구의 화담(花潭), 경주의 모량(毛良), 영천의 당현(唐峴), 고령의 무계(茂溪)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또 경상도 관찰사를 따라 대구에서 왜적을 토벌하기도 했다. 여섯 날 사이에 여덟 번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함창(咸昌) 당교(唐橋)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몽기는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1814년(순조 14) 사림이 청원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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