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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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鳳奎 |
영어공식명칭 | Do Bong-gyu |
이칭/별칭 | 완강(翫江),도효려(都孝廬)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감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851년 - 도봉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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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2년 - 도봉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36년 - 완강정 건립 |
거주|이주지 | 동강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동강리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시문리 |
사당|배향지 | 완강정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동강길 9-1[소월리 197]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성주(星州)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효자.
[개설]
도봉규(都鳳奎)[1851~1902]는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여 마을에서 효자로 천거되었다.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로 호는 완강(翫江)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도상곤(都尙坤), 할아버지는 도만동(都晩東), 아버지는 도기성(都岐成), 어머니는 울산박씨(蔚山朴氏) 박수찬(朴守燦)의 딸이다. 부인은 황보민령(皇甫民笭)의 딸로 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이다.
[활동 사항]
도봉규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내고 공부하기 어려웠기에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웠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스스로 공부를 독려하였으며 암기를 잘했다고 전한다.
1875년(고종 12) 아버지를 따라 동강(東江)[현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동강리]으로 이사하였다. 이때부터 몸이 허약해져 귀전(龜田)의 약수(藥水)를 먹으며 공부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여 매일 하루 세 번씩 술을 대접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강학 장소를 짓고 교육도 장려하였다.
1898년(고종 35)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신의 몸을 해칠 정도로 곡을 하였다. 팔공산(八公山)[1,193m]에서 장사 지내고 시묘살이를 하던 중 가뭄이 크게 들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에 산 아래 살던 사람들은 도봉규가 높은 산에 묫자리를 썼기 때문이라며 아버지의 무덤을 파내려 하였다. 다급해진 도봉규는 울면서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는데, 마침 다음날 아침부터 큰 비가 내려 못에 물이 가득 차게 되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 묘가 산 위에 있어 처음부터 마실 샘물이 없었는데, 묘 곁의 흙을 파니 샘물이 솟아났다. 이로 인해 도봉규는 3년간의 시묘를 잘 마칠 수 있었고, 향인(鄕人)들은 도봉규를 두고 ‘도효려(都孝廬)’라 부르며 칭찬하였다.
도봉규는 원래 몸이 허약하였으나 시묘 후에 잔병치레가 더욱 늘었고, 결국 1902년(광무 6)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묘소]
도봉규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시문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36년 향내의 사림(士林)들이 수계(修契)하여 도봉규를 기리고자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소월리에 완강정(翫江亭)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