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98 |
---|---|
한자 | 金宗元 |
영어공식명칭 | Kim Jongwon |
이칭/별칭 | 백두산 호랑이,타이거 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범 |
출생 시기/일시 | 1922년 7월 8일 - 김종원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8월 - 김종원 일본육군에 지원병으로 입대 |
몰년 시기/일시 | 1964년 1월 30일 - 김종원 사망 |
출생지 | 김종원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 308 |
거주|이주지 | 김종원 거주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229 |
성격 | 군인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대표 경력 | 내무부 치안국장 |
[정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군인.
[개설]
김종원(金宗元)[1922~1964]은 일제 강점기 일본육군 지원병으로 입대하였다. 광복 후 육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공산게릴라 토벌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잘못도 수차례 범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경찰 고위간부로 전신해서는 정치폭력을 불사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계]
1922년 7월 8일 경상북도 경산군 중방동 308번지[현 경산시 중방동]에서 김해 김씨 김용화(金容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빈곤가정에서 태어난 김종원은 경산공립보통학교[재학 중 1938년에 옥계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현 경산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으로 중퇴하고 1940년 ‘제1기 육군특별지원병’ 선발에 응모하여 합격하였다. 8월에 일본육군에 입대하여 태평양전쟁 발발 후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 전선으로 보내져 일본군 하사관으로 복무하였다.
일제 패망 후 환국하여 서울 동대문경찰서 교통과장이 되었다가 1946년 1월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 때 입대하여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 되었고 5월 1일 개교하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제1기로 입교하여 단기교육을 이수하고 6월 15일 중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국방경비대 군감대장(軍監隊長)으로 있다가 1947년 9월 모종의 사고로 면직되었는데, 1947년 6월 송호성(宋虎聲) 총사령관의 특별 배려로 원대복귀하였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麗順事件) 때 대위 계급으로 보병 제5연대 1대대장이 되어 반란군 진압에 투입되었으나 작전미숙으로 아군에 상당한 피해를 초래하였다. 돌산도(突山島)와 남면(南面) 및 여수시내 진입 후 다수 주민을 부역자로 간주하고 일본도와 소총·권총으로 직접 참살하였다.
1949년 2월 소령으로 진급하고, 경상남도 마산(馬山)에서 창설되는 16연대의 부연대장이 되었다. 그 해 8월 중령 진급과 동시에 부산 주둔 23연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병력 일부를 떼어 구성한 356부대[통칭 ‘맹호부대’]를 이끌고 11월부터 김달삼(金達三)과 남도부(南道富) 지휘하의 공산게릴라 토벌에 나섰다. 그때부터 1950년 8월까지 사이에 경상북도 영덕군과 경상남도 거제도 및 양산군 지구에서 벌인 작전 과정에 김종원은 보도연맹원(保導聯盟員) 포함 수백 명의 민간인을 임의로 처결하여 학살하고, 부하들도 서슴없이 구타하는가 하면 즉결 처분도 불사하여 악명이 높았다. 그 무렵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즐겨 썼고, 미 군사고문단도 그를 ‘타이거 김(Tiger Kim)’으로 칭하기는 하였으나 1950년 7월에 벌어진 영덕전투에서 김종원이 “부하에게 가혹한 반면 전투에서는 매번 어디론가 사라져 비겁했고 전술적 두뇌가 없어 무능했다"는 보고를 남겼다. 후배 장교들도 김종원이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런 중평 때문인지 1950년 7월에 보직 해임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특명으로 대령 진급과 동시에 임시수도 부산지구의 헌병대장으로 보임되었다. 이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아래 헌병 부사령관과 부산·경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연이어 승임(陞任)하였으며, 그 후로는 종종 대통령에게 직보하고 직명(直命)도 받는 관계가 되었다. 1950년 12월 ‘계엄사령부’의 명칭 변경에 따라 ‘경남북지구 계엄민사부장’이 되었는데, 포고문 등에서 자기 직명을 내무장관과 도지사보다 위에 올려놓곤 했다. ‘부산대학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이라는 자술(自述) 학력도 이 무렵에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라 한다. 1951년 4월에는 보도기사에 불만을 품고 연합신문 부국장과 기자를 불러다 마구 폭행하여 물의가 빚어졌고 결국 대통령이 유감을 표해야 했다.
1951년 2월 11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11사단 9연대 30대대에 의한 민간인 719명 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진상 파악을 위해 국회와 내무·법무·국방 3부 합동조사단이 20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4월 7일 현지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의 지령을 받은 김종원이 9연대 정보참모 최영두(崔永斗) 소령으로 하여금 1개 소대 병력을 공비로 위장하여 매복시켰다가 합동조사단의 차량을 습격하여 현장의 접근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실행은 되었으나 결국은 공작 정황이 드러나 그 해 8월에 김종원이 체포되고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2년 3월에 대통령이 “김종원의 애국충정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 견줄 만하다”면서 군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별명령으로 석방하였다. 그리고 불명예 제대했던 김종원을 정·부통령 선거 한 달 앞인 7월에 경무관으로 특채하여 전라북도 경찰국장으로 임명하였다. 1년 후인 1953년 7월에는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사령관을 겸하였고, 11월에는 경남경찰국장, 1954년 8월 경북경찰국장, 1955년 2월 전남경찰국장으로 계속 전임(轉任)하다 1956년 5월의 정·부통령선거 직후에 경찰 총수인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영전하였다.
1956년 9월 장면(張勉)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총격을 받고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체포된 범인의 재판정에 증인으로 나간 김종원이 발언 중의 법정모욕 혐의로 법원에 의해 고발당하였다. 그 여파로 1957년 3월에 경질되어 경찰전문학교장으로 전임하였다. 그러나 곧 사표를 내 면직되었고, 그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회오(悔悟)의 말도 남겼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에 장면 피습사건의 배후조종자는 김종원이었음이 뒤늦게 폭로되어 구속 수사를 받았다. 1심에서 무죄판결이 났으나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유죄로 바뀌면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62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소하였고 1963년 대통령 특사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안가 1964년 1월에 지병이던 당뇨병 악화와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