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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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慈仁- |
영어공식명칭 | Jain Big Tug-of-war Game |
이칭/별칭 | 큰줄당기기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유신 |
소멸 시기/일시 | 1926년 - 자인 큰줄다리기 전승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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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장소 | 대정들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
성격 | 민속놀이 |
노는 시기 | 정월대보름|2월 초하루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집단 민속놀이.
[개설]
전통 민속놀이 자인 큰줄다리기는 동네 꼬마들이 장난으로 줄을 당기는 골목줄다리기와, 여기에 어른들이 가세하여 큰 규모가 된 중줄다리기, 대규모의 마을 축제와 같은 큰줄다리기로 구분된다. 자인면 소재지에서는 정월대보름과 2월 초하루 사이에 아랫각단과 웃단, 서부와 동부로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다. 이러한 줄다리기 행사를 하기 전에 인근 지역에 초청장을 보내기도 했으며, 압량면, 용성면과 경산 사람들이 구경하러 올 만큼 큰 행사였다. 줄다리기 경기가 끝나면 줄에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믿어서 동네 사람들이 줄을 끊어가서 약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연원]
줄다리기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연원은 확실치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제주도의 줄다리기가 조리희(照理戱)라 기록되어 있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도삭(綯索)·갈전(葛戰)·조리지희(照理之戱)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줄다리기는 주로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서 많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놀이 도구 및 장소]
동부와 서부는 자기 구역에서 모아진 짚과 새끼로 각자의 본부에서 줄을 만들었다. 줄의 머리 부분을 줄목, 몸체를 원줄, 줄을 당길 때 원줄에 달아 놓은 곁가지를 종줄이라 한다. 종줄은 굵은 새끼로 만들지만 줄목과 원줄은 더 질기게 하기 위해서 짚으로 만든다. 꼰 세 가닥을 모아 다시 꼬는 방식으로 원줄의 굵기를 약 30㎝가 되게 만든다. 동부의 줄은 남성을 상징하여 ‘숫줄’이라 하고, 서부의 줄은 여성을 상징하여 ‘암줄’이라 하였다. 큰줄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1926년도의 것은 줄의 굵기가 2m, 그 길이가 각 300m, 종줄의 굵기가 10㎝, 길이가 7m 정도라고 전해진다. 줄다리기 장소로는 자인면 서부리 대정들이 자주 이용되었는데, 줄이 길고 줄꾼이 많아 넓고 평평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놀이 방법]
심판관의 총으로 경기 시작 신호를 하며, 경계선에서 일정한 거리까지 당겼을 때 ‘고’가 빠지거나 부러지면 동부가 패하고, 줄이 끊어지는 쪽이 패하는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놀이 하루 전날 동부와 서부의 줄꾼들은 줄목에 수장을 태우고 농악대를 앞세워 각 본부에서 줄다리기 행사장까지 가두행진을 하며 줄을 운반한다. 동부 수장이 준비한 ‘고’를 을러메고 행사장까지 운반하면 준비가 끝난다. 동부와 서부로 갈라진 줄꾼들이 자기편의 종줄을 잡고 당기는데, 이때 줄다리기 구령을 맞추기 위해 양편 줄가에 선 사람들이 소리를 내고 받으며 줄을 당긴다. 동부에서는 서부 줄이 당겨 오면 ‘서부 약자 위!’라고 하고, 서부에서는 동부줄이 당겨오면 ‘동부 약자 위!’라고 하며 서로 물리고 받는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정초에 자인면민 모두가 참가하는 중줄다리기 놀이가 펼쳐졌는데, 이때 자인면 전체를 동부와 서부로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었다. 줄을 만들 짚은 기부를 받았으며, 줄의 직경은 1m 내외이며 길이는 약 200m이다. 과거 자인면사무소나 동부리 큰 회나무 자리 부근에서 줄을 당겨 승부를 가렸는데, 이 승부의 결과에 불만이 있거나 줄다리기에 대한 흥이 고조되면 동부와 서부 대표들이 소집되어 큰줄다리기 개최를 위한 토의를 했다. 이 결정에 따라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 자인면 동부와 서부는 각각 자기편 줄다리기의 제반 사항을 관장하는 수장을 선출하고, 본부를 정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앞서 펼친 중줄다리기는 자인면 단위의 행사이지만, 큰줄다리기의 참가지역은 자인면 전체와 경산, 청도, 하양, 영천까지를 포함하였다. 대량의 짚이 소요되므로 각 마을 단위로 농사 형편에 맞게 할당했다. 큰줄다리기는 3년이나 5년에 한 번씩 중줄다리기를 한 이후에 치러지는데, 음력 정월대보름이나 2월 초하루 중에 택일하였다. 동부의 수장은 한장군이 입었던 모양의 장군복을 입고, 서부의 수장은 한장군 누이가 입었던 모양의 장군복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외의 줄꾼들은 한복을 입었다.
[현황]
기록에 의하면 자인 큰줄다리기는 1926년을 마지막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2020년 현재 90세인 자인면 원당리 주민 최태진은 15세 무렵에 ‘줄땡기기’를 구경한 적이 있다고 기억하였다. 최태진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어른들은 정월 보름 쯤에 자인면을 동부와 서부로 갈라서 경기를 진행했으며, 서부 사람들은 평사리 주민들을 초청하고, 동부 사람들은 용성면 주민들을 초청했다. 다른 동네 주민들을 초청할 때는 큰 종이에 줄다리기 행사가 시작되는 날짜와 시간을 써서 보내고, 자인면 곳곳에도 종이를 써 붙여서 면민들에게 알렸다. 줄다리기 경기를 하는 날에는 자인 면민과 이웃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서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무 밑동만큼 두꺼운 큰줄을 원줄로 삼고, 사람들은 지네발처럼 곁가지로 난 종줄을 쥐고 당겼다고 한다. 그날 큰 술단지 몇 개에 술을 가득 채워두고 경기가 끝나자 서부와 동부 주민들이 함께 나눠 마셨다고 한다. 당시 경기에서 이긴 쪽은 서부였으며, 그 이후로는 줄다리기 경기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최태진의 기억 속에 있는 1940년대의 줄다리기는 자인면민 모두가 참가하는 ‘중줄다리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