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036
한자 宗敎
영어공식명칭 Religion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창환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행해지는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경산 지역은 최초의 정치 집단인 압독국(押督國)이 세워졌을 때부터 원시 종교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시기 종교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 등 자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종교 활동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경산 지역에 남겨진 종교 유적이나 배출된 인물을 보면 경산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종교가 질적인 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산 지역의 최고(最古) 사찰은 491년(소지왕 13)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지금의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에 창건한 선본사(禪本寺)이다. 선본사의 건립은 대구 지역의 동화사(桐華寺)보다 2년 앞선 것이며,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보다 한 세대 이상 앞선 것이다. 또한,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세존(世尊) 이래 최고의 불교 학자라는 명성을 얻은 원효(元曉)[617~686]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1206~1289]이 바로 경산 지역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경산 지역은 종교적으로 일찍 발달하였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종교로 경산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불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선본사가 491년(소지왕 13)에 건립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불교가 경산 지역에 포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불교는 경산 지역의 주축 종교가 되었고,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다. 사찰의 건립은 통일 신라는 물론, 이후 고려와 유교의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꾸준히 이루어졌고, 현재 경산 지역에는 25개 종단의 106개 사찰이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경산 지역에서 불교가 활발히 전개되었던 삼국 시대에 함께 전파된 종교로는 도교(道敎)를 들 수 있다. 신라의 화랑도가 유불선(儒彿仙) 삼교(三敎)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주와 가까운 경산에도 분명 도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자취는 신라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6]의 아들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는 하양 지역의 환성사(環城寺) 대웅전 앞에 있는 누각인 수월관(水月觀)의 현판에서 찾을 수 있다. ‘관’은 도교의 사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경산 지역의 도교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불교에 흡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산 지역에서 불교·도교와 함께 전파된 종교는 유교이다.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655~?]은 우리나라 유교의 종주(宗主)로, 경산 출신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유교 역시 경산 지역과 인연이 깊다. 다만, 설총이 신라 왕궁에서 성장하고 왕경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경산 지역 인물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한편, 681년(신문왕 2) 국학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들을 가르친 것을 감안하면, 당시 유교는 귀족에 국한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유교가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고려 후기 각 군현에 향교가 설립된 이후이다. 경산 지역을 비롯하여 하양·자인 지역에도 향교가 설립되었고, 유교가 일반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이 건국되면서 경산 지역의 유교는 한층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전기 예제(禮制)를 제도화하고, 조묘(祖廟)의 의례와 일반의 상제(喪祭) 등을 법제화하는 데 기여한 허조(許稠)[1369~1439], 퇴계의 학맥을 이은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인 성재(成齋) 진섬(陳暹) 등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같은 조선 시대 문헌을 살펴보면 경산 지역의 효자와 열녀에 대한 기록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유교 사상이 경산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문물 및 사상의 유입으로 유교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었고, 천주교와 기독교가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조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된 1882년 이후 경산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남천면 하도리 모개골에 31명의 신자가 있었고, 영천·청도 지역과 인접한 경산의 구룡산 정상에 교우촌이 있었다. 이러한 소규모 모임이 토대가 되어 1887년 당시 진량면에 북리공소가 설립되었고, 1928년에 하양성당이 설립되었다. 천주교의 교세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계속 확장되었고 경산과 자인 지역에 각각 성당이 설립되었다. 1990년 이후에는 경산 지역이 교육 도시로 부상하였는데, 이와 함께 천주교의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천주교와 비슷한 시기에 포교를 시작한 개신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선교사 아담스(James E. Adams)[1867~1929]에 의해 경산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교회를 개척하면서 경산 지역 교회의 제1대 당회장을 역임하였다. 경산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교회는 사월교회이다. 이후 봉회교회·금곡교회·경산교회의 설립에 이어 경산 지역 곳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1962년 경산 지역의 교회는 기존에 소속되었던 경북노회에서 분립하였고, 경청노회가 설립되었다. 2020년 현재 총 7개의 시찰에 137개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

한편, 1960년대 이후 현대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종교들이 생겨나거나 유입되었다. 현재 경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종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대순진리회, 성덕도, 여호와의 증인, 원불교, 한국SGI 등이다.

[불교]

경산 지역 최초의 사찰은 491년(소지왕 13) 극달화상이 창건한 선본사이다. 선본사는 대구 지역에 소재한 동화사보다 2년 앞선 것이며, 불교가 공인되기 37년 전 건립된 사찰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경산 지역이 여타의 지역보다 불교가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산이 원효라는 걸출한 승려를 배출하였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이른 시기 불교가 보급되었던 경산 지역에는 통일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반룡사(盤龍寺)·불굴사(佛窟寺)·환성사(環城寺)·대곡사(大谷寺)·신림사(新林寺)·대흥사(大興寺)·송림사(松林寺)·원효암(元曉庵)·홍주암(紅珠庵)·천성암(天成庵) 등이 그것이다. 이 중 다수의 사찰이 경산 출신의 원효와 직·간접적으로 연관 된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였지만, 고려 시대 경산 지역의 사찰 건립은 신라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천면 동학산밀암사(密岩寺)가 있다는 기록만이 고려 시대 경산 지역의 사찰 창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고려 시대 경산 지역의 불교 문화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초오대사(超悟大師)와 일연이 고려 시대 경산 지역에서 배출된 승려라는 사실은 여전히 경산 지역에서 불교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에는 1628년 안흥사(安興寺), 1637년 경흥사(慶興寺)가 창건되었다.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장림사(長林寺)·선광사(善光寺)·하양포교당(河陽布敎堂)·자비정사(慈悲精舍) 등이 창건되었다.

2020년 현재 경산 지역에는 7개 동(洞)에 28개, 와촌면에 24개, 용성면에 13개, 하양읍에 12개, 남천면에 11개, 자인면에 7개, 남산면에 5개, 압량면에 4개, 진량읍에 2개의 사찰이 있으며, 총 106개이다.

[유교]

경산 지역에서 배출된 삼성현(三聖賢) 가운데 한 사람인 설총은 경사(經史)에 두루 달통하여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풀이하였으며, 후생을 가르쳐 우리나라 유교의 종주로 추앙받고 있다. 다만, 설총은 월성(月城) 대궁(大宮)의 서편 문천(蚊川) 가에 있는 요석궁(瑤石宮)에서 태어나 신라 왕궁에서 성장하고 왕경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설총의 유교를 경산 지역 일반의 수준과 결부시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경산 지역의 압량면 여천동[지금의 경산시 여천동]에 설총의 정자가 있었고, 이것이 허물어지자 지역민들이 남산면 하대리도동재(道東齋)라는 재사(齋舍)를 지어 설총에 대한 추모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설총이 경산 지역의 유교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유교가 경산 지역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는 여말선초이다. 경산향교는 고려 후기인 1390년(공양왕 2)에 건립되었다. 자인향교는 고려 후기 공민왕 연간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구전되나, 명확하게 고증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자인향교는 1562년(명종 17)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에 의해 중건되었다. 하양향교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조선 전기 정승을 지낸 허조(許稠)가 배출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의 서쪽 3리에 향교가 있다는 기록 등을 미루어 볼 때, 적어도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말선초 경산 지역에 설립된 향교를 통해 보급되기 시작한 유교 사상은 조선에 들어서면서 점차 일반화되었다.

조선 시대 경산 지역에는 학덕과 명망을 갖춘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권근(權近)에게 수학하고 1390년(공양왕 2) 과거에 급제한 후 조선의 예제를 제도화 하는데 큰 공이 있는 허조(許稠)[1369~1439]를 비롯하여 퇴계의 제자인 전경창(全慶昌)에게서 학문을 배운 최문병(崔文炳), 정구(鄭逑)의 제자 가운데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와 같은 인물이라는 평을 얻은 진섬(陳暹) 등이 있다. 지역의 유림에서는 금호서원용계서원을 건립하여 유학자들을 제향하였다.

유교 이념의 정착과 더불어 경산 지역에는 많은 효자와 열녀가 배출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산현지(慶山縣誌)』, 『삼강록(三綱錄)』 등에는 경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효행과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근대에 이르러 조선이 서양 열강의 침략을 받고, 새로운 문물 및 사상이 유입되면서 유교의 영향력 또한 약화되었다. 이에 1960년대 전통의 가치관인 유교를 계승하려는 성균관유도회가 결성되자, 경산 지역에도 이에 동참하는 지부가 설립되었다. 다만, 현재 경산 지역은 유림의 고령화로 세대 교체의 과제를 안고 있으나 해결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천주교]

경산 지역에 천주교가 언제 유입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진술과 판결문 등을 모아놓은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류국인(劉國仁)이 충청도에서 이부춘(李富春)에게 천주교를 배운 죄로 경산 지역에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배자의 신분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마도 경산 지역 내 천주교 전파는 경상북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자인면에 있는 구룡산 정상에 천주교 교우촌이 최초로 형성되었다고 하며, 신자들은 청송 지역의 노래산에 살던 사람들로 영천 지역을 거쳐 옛 자인 지역[현 경산시 용성면]의 큰골로 피난을 와 마을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경산 지역의 모개골과 지금의 경산시 진량읍인 하양 북동에 교우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1866년에 있었던 병인박해를 극복하며 경산 지역에 천주교를 뿌리내렸고, 이러한 신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1900년대 경산 지역 내 천주교의 교세가 더욱 커져갔다. 1910년에는 하양 지역으로 대구선이 지나가면서 외지의 인구가 대거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천주교 신자도 늘어났다. 1925년에는 하양공소가 설립되었으며, 후에 경산 최초의 성당인 하양성당으로 승격하였다.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경산 지역의 천주교는 일시적으로 침체되었으나, 미국의 구호물자가 천주교를 통해 배급되면서 다시 도약하게 되었다. 1952년 경산성당이, 1972년 자인성당이 각각 설립되었다.

1990년대에는 경산 지역이 교육 도시로 부상하면서 유입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천주교의 교세 역시 더욱 확장되었다. 이에 경산 지역 곳곳에 성당이 설립되었다. 1995년 용성성당, 1996년 압량성당, 1997년 진량성당, 2000년 중방성당, 2002년 사동성당, 2006년 정평성당, 2007년 백천성당이 차례로 설립되었으며 현재까지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개신교]

경산 지역에 개신교를 보급한 사람은 아담스(James E. Adams)[1867~1929] 선교사로, 대구·경상북도 지역에 처음으로 개신교를 전파한 베어드(William M. Baird) 목사의 후임자이다. 아담스 선교사는 1897년 대구 지역에 부임하여 대구·경상북도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였고, 자신의 이름도 안의와(安義窩)라는 한글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대구제일교회의 교세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불편한 교통과 불순한 일기 때문에 10여 명의 교인이 옛 경산군 고사면 매호동에 있던 김근명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사월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사월교회로부터 분립된 봉회교회[현 진량제일교회]를 비롯하여 금곡교회경산교회 등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경산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경산 지역의 교회들은 모두 1916년 설립된 경북노회에 속해 있었는데, 1962년 10월 22일 열린 제47회 총회를 통해 경북노회로부터 5번째로 경청노회로 분립하게 되었다. 경청노회는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에서 총회를 열어 조직을 편성하고, 안중섭 목사를 초대 노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시찰은 경산·경산북·자인·청도동·청도서부로 총 5개였다.

경청노회는 총회가 예장통합 측에서 분립된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경산 지역의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2020년 기준 경청노회에는 경산중부·경산동부·시지·경산남부·경산북부·청도동부·청도서부 총 7개의 시찰이 있으며, 소속된 교회는 137개이다.

[신종교]

1960년대 이후 사회의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종교들이 생겨나거나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원인은 기성 종교의 폐쇄화나 교리의 새로운 해석, 새로운 시대적 조류 등 다양하게 주장되고 있다. 경산 지역 역시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이후 다양한 신종교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신종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대순진리회, 성덕도, 여호와의 증인, 원불교, 한국SGI 등이다. 이 중 경산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단체는 한국SGI여호와의 증인으로, 한국SGI는 4개, 여호와의 증인은 5개의 회관을 건립하여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규모나 활동은 기성 종교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