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20
한자 金海 金氏
영어공식명칭 Kimhae K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기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500년 전후 - 김해 김씨 김한손 입향
본관 김해 - 경상남도 김해시
성씨 시조 김수로
입향 시조 김한손

[정의]

김수로를 시조로 하고 김한손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개설]

김해 김씨는 경상남도 김해시를 본관으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이다. 김해 김씨의 시조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이며, 신라의 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김유신 이후 분파되어 왔다. 김해 김씨 경산 지역 입향조는 김한손(金漢孫)이다.

[연원]

김해 김씨의 본관인 김해는 경상남도 남동부에 자리한 지역으로, 고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다.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 금관소경이 설치되었고, 경덕왕 때는 김해소경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에 다시 김해부가 되었고, 995년(성종 14)에 금주(金州)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1000년(목종 3)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1270년(원종 11)에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이후 승강을 거듭하다가 1413년(태종 13)에 김해도호부가 되었다. 이후 1895년(고종 32)에 지방 제도 개편으로 김해군(金海郡)이 되었다. 1981년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였고, 1995년에는 김해시와 김해군이 통합되었다.

김해 김씨의 시조는 금관가야[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가락국 건국 신화에 의하면,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나라를 이끌 군장이 필요하여 하늘에 의식을 올렸다. 이에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담긴 금 상자를 내렸다. 금 상자에 담긴 알 중 하나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의 이름을 ‘수로’라 짓고, 금 상자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로 하였다. 가야의 왕이 된 김수로는 천축국에서 온 허황후와 혼인하였다. 이후 김수로의 후손인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귀순하였고,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하였다. 김유신은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 세계를 이어갔다. 김해 김씨는 중시조 김유신 이후 가세가 더욱 번창하여 148개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148개 파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 삼현파(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 수가 가장 많은 편이다.

[입향 경위]

김해 김씨는 경산 지역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어 단일한 입향조를 파악할 수는 없다.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경위로 입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을 통해 입향 경위나 시기를 알 수 있는 경우도 일부 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쓰인 경산 지역 읍지인 『장산지(獐山誌)』 성씨 조에는, 찰방을 지낸 김한손(金漢孫)이 연산군 시기에 청도에서 이거하여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한손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사촌형으로, 무오사화를 피해 경산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현황]

김해 김씨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산시에 23,916명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김해 김씨 관련 유적으로는 긍구정(肯構亭)과 김창항 효자각 등이 경산시에 남아 있다. 긍구정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내리에 있으며, 김한손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21년 건립한 재사이다. 내리공단 지역 산기슭의 남향에 자리하고 있는데, 동향한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긍구정이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마당의 건너편에는 아래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배치 형태를 이룬다.

김창항 효자각은 경산시 진량읍 문천리 산31에 있다. 김창항(金昌恒)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기채(奇彩)이다. 김일손의 후손으로 순조 연간에 참봉을 지냈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노모가 병이 들자 더욱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는데, 이에 감응하여 얼음 속에서 잉어가 나오고 뜰 안에 꿩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김창항의 효행이 1928년 『오륜행실도』에 실리자 김봉달(金鳳達)의 주도하에 김해 김씨 문중에서 정려각을 세워 표창하였다. 「효자각기(孝子閣記)」도 남아 있는데, 1933년 5월 한동유(韓東愈)가 지은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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