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96
한자 朴應得
영어공식명칭 Park Eungdeuk
이칭/별칭 응직(應直),죽고(竹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8년연표보기 - 박응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박응득 정유재란 창의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박응득 무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39년연표보기 - 박응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4년 - 박응득 묘비 건립
출생지 박응득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대원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박응득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신제리 지도보기
성격 무관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관직 상호군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무신.

[개설]

박응득(朴應得)[1578~1639]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무과 급제 후 철산군수(鐵山郡守)·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가(扈駕)하였다.

[가계]

박응득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응직(應直), 호는 죽고(竹皐)이다. 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박번(朴蕃), 어머니는 배동식(裵東植)의 딸 대구 배씨(大邱裵氏), 할아버지는 생원(生員) 박근손(朴謹孫), 증조부는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지낸 박운달(朴雲達)이며, 부인은 어영목(魚榮穆)의 딸 함종 어씨(咸從魚氏)와 최병직(崔炳直)의 딸 영천 최씨(永川崔氏)이다.

[활동 사항]

박응득은 1578년(선조 11) 경상도 자인현(慈仁縣) 대원리(大院里)[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대원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류시번(柳時蕃)[1569~1610]에게 학문을 배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같은 고을의 박몽리(朴夢鯉)·박몽량(朴夢亮)·이춘암(李春馣)·이춘함(李春{香+咸}) 등과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가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울산 도산성(島山城) 전투에 참전하였다. 1606년(선조 39)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주부(主簿)·선전관(宣傳官)·용양위 사직(龍驤衛司直)·부호군(副護軍)·오위도총부 경력(五衛都摠府經歷)·철산군수(鐵山郡守)·훈련 부정(訓鍊副正)·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수행하였다.

[묘소]

박응득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신제리 원봉(圓峰)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응득은 사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1974년 정화식(鄭華植)이 찬한 묘비가 묘소 앞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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