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03
한자 金毓萬
영어공식명칭 Kim Yukman
이칭/별칭 무중(茂重),국포(菊圃)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감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741년 - 불망비 건립
출생지 김육만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육만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신한리 지도보기
성격 선비
성별
본관 김녕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선비.

[개설]

김육만(金毓萬)[?~?]은 고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재산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가계]

김육만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무중(茂重), 호는 국포(菊圃)이다.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김육만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순후(淳厚)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부지런하기까지 하여 소싯적에 많은 재산을 모았다. 1730년(영조 6) 흉년이 크게 들어 3년 동안 지속되자, 지역 사람들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세금도 밀리게 되었다. 이에 김육만은 집안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나아가 자신의 사비로 밀린 세금까지 대납해 주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김육만의 선생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정부에서는 김육만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려주었다.

[묘소]

김육만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신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41년 ‘가선대부 김녕김공 영세불망비(嘉善大夫金寧金公永世不忘碑)’를 건립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글씨가 깎여나가자 1903년(광무 7) 다시 송덕비를 세웠다. 1997년 송덕비를 경산시 와촌면 신한리로 이건하면서, 비각인 창덕각(彰德閣)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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