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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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기원 전후 시기부터 경산 지역에는 압독국(押督國) 혹은 압량국(押梁國)이라는 초기 국가가 번영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10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기록, 지미왕[재위 112~134] 때 신라가 정벌하여 군(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 등이 병존하고 있어 압독국의 멸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압독국의 중심지는 현재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임당토성 유적 등이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106년 1월부터 3월까지 압독에 행차하여 진휼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신라사 최초의 순행(巡幸)으로 주목된다. 또한 용성면 용산리에 위치한 용산산성(龍山山城)은 신라시대의 장산성(獐山城)으로 비정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최고의 격전지이자 수도 경주(慶州) 지역의 핵심 방어거점으로 중요시되었다. 642년에는 김유신(金庾信)이 압량주 군주(押粱州軍主), 656년에는 김인문(金仁問)이 압독주 총관(押督州摠管)이 되어 군사적으로 활약한바 있다.
경산 지역은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활발한 교통 활동을 바탕으로 눈부신 고대(古代) 문화를 이룩하였다. 기원전후 무렵에 조성된 양지리의 널무덤 유적은 압독국이 중국 대륙을 상대로 교역망을 구축하여 막대한 경제적 부(富)를 축적하였으며, 소월리의 유적 출토 목간(木簡)[경산 소월리 목간]은 신라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압독군에서 토지 현황 조사 및 결부(結負)를 시행한 흔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임당동 고분군 등은 경주 일대에 버금가는 최고 수준의 고분(古墳) 문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신라 불교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히는 원효(元曉)와 한국 유학의 종주(宗主)로 추앙받는 설총(薛聰) 또한 고대 경산의 문화적 역량을 대표한다.
[초기 국가, 압독국]
경산 지역은 금호강과 그 지류의 풍부한 수자원, 경북 내 가장 넓은 충적평야에서 비롯된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압독국이 등장하였다. 특히 금호강과 남천 사이의 넓은 들판 및 구릉 일대에 국읍(國邑)을 형성하였으며, 현재의 경산시 전역과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욱수동·노변동 일대, 동구의 불로동·안심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기원전후 무렵에 조성된 양지리 유적의 1호 널무덤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성운문경(星雲文鏡), 26점의 오수전(五銖錢)이 장식된 꺽창집[漆戈鞘] 등 획기적인 유물이 출토되어 삼한 소국 단계의 한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로 주목받고 있다.
경산 지역에서 번성하였던 압독국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로 편입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108)조에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는 기록이 보이고,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良州)조에는 “지미왕[112~134] 때 압량소국(押梁小國)[혹 압독소국]을 쳐 빼앗아 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에 따르면 2세기 초반에는 신라에 통합되어 압독군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임당동 고분 유적 발굴조사 등 고고학 연구 성과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4세기 무렵에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압독군으로 개정된 후에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자치권을 유지하였다고 이해된다.
[삼국 시대]
경산 지역은 금호강 수계를 따라 동쪽의 경주·영천과 서쪽의 대구·낙동강 본류를 연결하며, 청통천을 따라 북쪽으로 군위·남천을 따라 남쪽으로 청도 방면으로 곧장 연결되는 교통로상 결절점이다. 이에 따라 압독국 시기부터 문물 교류의 중심지로 인간집단의 왕래와 경제력 축적에 유리한 환경이었으며, 압독군으로 개정된 이후에도 경주 지역에서 서쪽 방면을 왕래하는 군사적·경제적 관문(關門)으로 중시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218년 백제군이 장산성(獐山城)을 포위 공격하자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반격하였던 사실이 전하고, 642년 백제군이 대야성(大耶城)[경상남도 합천 지역]까지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자 김유신을 압량주 군주로 임명하여 수도인 경주의 최후 방어선을 구축한 기록이 확인된다. 당시 김유신이 군사를 훈련하며 백제군을 방비하였던 흔적은 압량읍에 현존하는 병영유적(兵營遺蹟)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656년에는 당나라 숙위로 있다가 귀국한 김인문이 압독주 총관에 임명되어 장산성 축조를 감독하였는데, 요새를 설치하였다[設險]는 기록이 있다. 장산성은 현재 경산시 용성면 용산리의 용산산성으로 비정된다. 신라가 서쪽 방면의 최고 요충지로 경산 지역을 중시하였으며, 백제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장산성 일대를 핵심적인 군사 거점으로 경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대의 경산 지역은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했던 만큼 문화적으로도 수준 높은 역량을 보유하였다. 한국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며, 『금강삼매경론소(金剛三昧經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을 찬술하였던 원효(元曉)와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여 유학 경전을 한국 사회에 널리 보급하였던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은 고대 경산의 문화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원효는 압량군(押梁郡) 남쪽의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원효가 태어난 나무를 ‘사라수’라고 하였으며, 그 나무에서 나는 밤을 ‘사라밤[裟羅栗]’, 나무 옆에 지은 절을 ‘사라사(裟羅寺)’라고 불렀다. 먼 옛날 부처가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했음을 고려하면 많은 신라인들이 원효를 얼마나 존숭(尊崇)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압량군 불지촌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을지 짐작할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
경산 지역은 통일 신라 시대에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689년 신문왕(神文王)이 장산성에 직접 행차하였고, 장차 달구벌(達句伐) 곧 현재의 대구 지역으로 천도(遷都)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신라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던 압독군과 장산성이 새로운 도읍지 마련과 천도 과정에서도 여전히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757년 경덕왕(景德王)이 전국 주(州)·군(郡)·현(縣)의 명칭과 행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압독군은 장산군(獐山郡), 노사화현(奴斯火縣)은 자인현(慈仁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한편, 통일 신라 시대 경산 지역은 국가제사인 중사(中祀)가 이루어졌던 신라오악(新羅五嶽) 가운데 중앙의 부악(父嶽) 공산(公山)의 소재로 중요시되었다. 통일된 신라의 국가적 상징으로 치제(致祭)되었던 오악 중에서도 ‘중악(中嶽)’ 혹은 ‘부악[아버지 산]’으로 불린 팔공산의 존재는 경산의 중요한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통일 신라는 물론 고려 시대까지 국가적 관리 대상으로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