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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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林寺- |
영어공식명칭 | Shinrimsa Temple Site |
이칭/별칭 | 금당사 터,신림사지,금당사지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들뫼길 178-30[점촌동 259]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점촌동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절터.
[개설]
신림사(新林寺) 터는 통일 신라 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림사가 있던 터이다. 신림사의 창건 당시 이름은 금당사(金堂寺)였으나 1620년(광해군 12)에 ‘신림사’로 개칭하였다. 17~18세기에 번성하였던 신림사는 19세기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일제 강점기까지 유지되다가 이후 폐사되었다.
[변천]
『여지도서(輿地圖書)』 자인현(慈仁縣) 사찰(寺刹) 항목을 보면 신림사는 현성산(賢聖山)[400m]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범우고(梵宇攷)』에는 보다 많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신림사는 자인현의 서쪽 십리에 있는 현성산에 있는데,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금당사(金堂寺)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오층탑만 남아 있던 것을 1620년(광해군 12)에 승려 백양(白楊)이 선당(禪堂)을 짓고 절 이름을 ‘신림사’로 고쳤다. 1621년(광해군 13)에 승려 법성(法性)이 중건하였다. 산내 암자로 명적암(明寂庵), 백운암(白雲庵), 성재암(聖齋庵) 등이 있었는데, 명적암은 신림사로부터 서쪽으로 백보 쯤에 있고, 성재암은 자인현의 남쪽 십리에 있는 현성산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신라왕이 후사가 없다가 성재암에서 기도를 하여 어진 아들을 얻었기에 산 아래 마을을 독자동(獨子洞)이라 하고, 그 위의 산을 상왕산(上王山)이라 하였다. 백운암은 자인현의 남쪽 십오리에 있는 삼성산(三聖山)[554m]에 있는데, 1700년(숙종 26)에 승려 신관(信寬)이 창건하였다. 신림사와 같은 이름의 사찰이 하양현(河陽縣)에도 있다고 한다.
번성하던 신림사는 19세기에 들어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자인현 불우 항목과 『교남지(嶠南誌)』 자인군 사찰 항목에 의하면, 신림사 소속이었던 3개의 산내 암자가 모두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림사는 적어도 일제 강점기 말엽까지는 유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림사의 폐사 시기는 이후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위치]
『여지도서』에 따르면 신림사는 현성산에 있었다고 한다. 현성산은 경상북도 경산시 유곡동과 여천동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삼성산의 줄기이다. 신림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대구한의대학교[경상북도 경산시 한의대로 1] 정문 서편의 구릉 일대, 계림골프연습장[경북 경산시 들뫼길 178-30] 주변으로 판단된다. 인근 밭에서 다수의 기와편과 자기편(磁器片)이 채집되었다. 한편, 신림사 터는 대구한의대학교 동편에 있는 원효암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신림사 터로 추정되는 밭에서 탑, 불상, 부도, 비석 귀부(龜趺), 문인석, 망주석 등 22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현황]
신림사 터에서 발견된 22점의 유물은 경산시립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부도 2기에는 각각 ‘서화당(西化堂)’과 ‘○심당(○心堂)’이라고 쓰여 있다. ‘서화당’ 부도 뒷면에는 ‘건륭기묘립(乾隆己卯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59년(영조 3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신림사는 통일 신라 시대 창건되어 17~18세기에 크게 번성하였던 사찰로, 사료의 부족으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역사가 오래 되어 경산 지역 불교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