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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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環城寺-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정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2년 - 「환성사 거북바위」 설진담으로부터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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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6년 - 「환성사 거북바위」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수록 |
관련 지명 | 경산 환성사 수월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환성로 392-30[사기리 150] |
채록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 |
성격 | 지명 유래 전설|자연물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심지 왕사|선월 대사|주지|객승 |
모티프 유형 | 게으름|신성한 자연물의 훼손과 징벌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에 있는 환성사의 흥망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환성사 거북바위」는 심지 왕사(心地王師)의 창건 이후 흥망을 거듭한 환성사(環城寺)의 내력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수월관(水月觀)과 거북바위의 이름 유래 및 영험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지의 게으름과 교만, 금기의 파기로 인해 사찰이 불타고 쇠락하게 된다. 이후 많은 노력으로 사찰이 새롭게 부흥하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후인들에 대한 경계를 전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문화유적총람』을 비롯해, 2002년 간행된 『경산의 전설과 민담』, 2005년 간행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도 같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1992년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 주민 설진담[남, 당시 50세]으로부터 채록하였다.
[내용]
환성사는 835년(신라 흥덕왕 10)에 41대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 왕사가 이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하였다 한다. 그 후 고려 말에 화재로 인해 일부가 소실된 것을 1635년(조선 인조 13)에 신감 대사(神監大師)가 증수하였고, 1897년(광무 원)에 선월 대사가 다시 고친 후 1973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오늘날 사찰 경내에는 대웅전과 수월관 그리고 신검당과 요사채 등이 원형대로 잘 복원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심지 왕사가 절을 짓고 난 후부터 갑자기 절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하루에도 수백 명이 넘는 신도들이 드나들어 잠시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절에서는 매일같이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밥을 해 대려니 곡식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취사에도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콩나물 반찬을 하려면 보통 시루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둘레가 수십 자나 되는 돌 시루를 만들어 콩나물을 해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 때 이 절의 주지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또 한 번 이 절에서 위대한 선사가 났으므로 사찰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주문을 세우고 대웅전 앞쪽에 큰 연못을 파 누각을 짓고 이름을 ‘수월관’이라 했다. 이는 달이 떠 연못에 비치는 광경을 수월관에서 보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 선사가 수월관 앞의 연못을 보며, “만일 이 연못을 메우면 이 절의 불기가 쇠하리라.” 하고 예언했기 때문에 역대 주지들이 이 연못을 소중히 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백 년이 지나니 이 이야기를 아는 이는 적어지고 이야기는 전설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또한 절 입구에는 ‘거북바위’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거북이와 너무 많이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심지 왕사가 이곳에 절터를 잡을 때 이 바위를 보고서 이 바위가 있는 한 이 절은 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 또한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조선 초에 국가가 불교를 심하게 억압했으나 환성사만은 하루도 신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환성사의 주지는 젊어서는 큰 덕으로 불자들의 숭앙을 받았으나 늙어서는 게으름이 늘어 신도들이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겼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사람을 시켜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의 목을 자르게 했다. 거북바위의 목을 정으로 깨뜨리니 갑자기 연못의 물이 붉게 변하였는데 이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절이 오히려 더 소란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거지 같은 객승이 찾아와 묵고 가기를 청하자 주지는 이를 귀찮게 여기며 구석진 골방을 주고 음식 접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튿날 객승이 절을 떠나면서 “이 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저 연못 때문이니 저것을 메우시오.” 라고 말했다. 주지는 이 말을 듣고 즉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연못을 메우려고 했다. 그런데 흙을 한 삽 퍼붓자 갑자기 연못 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날아오르더니 슬피 울고는 산 너머 동화사 쪽으로 날아갔다 한다. 겁을 먹은 동네 사람들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으려 하자 주지는 절의 사람들을 동원해 연못을 메우게 했다. 꼬박 백 일이 걸려 연못을 메우고 마지막 한 삽 흙을 퍼붓자 갑자기 온 절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불은 그 웅장하던 건물들을 모조리 태웠고 대웅전과 수월관만 겨우 남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절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에 남은 건물들이 보물로 지정되고 또 현재의 주지가 원형을 잘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찰이 새롭게 부흥하게 되었다. 신도들의 발길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환성사는 영험이 있는 사찰로 알려지게 되었다.
[모티프 분석]
「환성사 거북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게으름’, ‘신성한 자연물의 훼손과 징벌’이다. 환성사의 주지는 게으름을 피우고 감사함을 잊은 채 지내는 것도 모자라 절의 흥망과 관련이 있는 수월관 앞 연못과 거북바위를 훼손한 결과 절이 불타게 되고 신도가 끊기는 징벌을 받게 된다. 「환성사 거북바위」 설화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증거물로 남아 있는 곳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자연물 전설인데, 일반적으로는 ‘손님 끊어 집안 망친 며느리’ 민담과 함께 전하는 경우가 많다. 「환성사 거북바위」는 게으름과 자연물 훼손의 주체가 주지이지만 대체로는 부잣집 며느리가 그 주체로 등장한다. ‘주지-객승-절의 패망’은 ‘며느리-도승-부자의 패망’과 그 구조가 비슷하여 광포 전설인 ‘장자못 전설’과도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설화 모두 게으름을 경계하고 가진 자의 사회적 배려와 베풂의 당위성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