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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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岩山山神靈-居處- |
이칭/별칭 | 옥곡동 성암산 범굴,성암산 범굴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주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6년 -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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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2년 -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 전일주로부터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5년 -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 「옥곡동 성암산 범굴」이라는 제목으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 「성암산 범굴」이라는 제목으로 『경산문화대사전』에 수록 |
관련 지명 | 성암산 -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 |
채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 |
성격 | 설화|지명 유래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호랑이|스님|동자승 |
모티프 유형 | 호식|개과천선과 실수|호랑이 숭배 사상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에 있는 성암산의 범굴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은 경상북도 경산시 성암산의 범굴에 대한 명칭의 기원을 담고 있는데, 호식하던 호랑이가 개과천선하여 성암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호랑이가 개과천선했으나 한순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살생을 저지르고 자책하여 죽음을 맞이하나 성암산 산신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2005년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는 「옥곡동 성암산 범굴」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2002년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 전일주[남, 당시 50세]에게 채록한 것으로 호랑이가 개과천선하여 성암산 수호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2009년 경산시립박물관에서 간행한 『경산문화대사전』에 「성암산 범굴」이라는 제목으로 인용되어 있다.
첫째 이야기는 호랑이의 실수에, 둘째 이야기는 호랑이의 개과천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용]
성암산은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에 자리 잡은 해발 469m의 산이다. 성암산의 8부 능선에는 성암굴이라는 바위굴이 있다. 이 석굴은 신라 시대 한 스님의 이야기와 조선 시대 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두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신라 시대의 이야기부터 알아본다. 신라 때 한 스님이 동자승과 함께 이 석굴에서 수도를 정진하였다. 어느 날 스님 앞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 살려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스님이 자세히 보니 입안에 여인의 비녀가 가로질러 있는지라 이를 제거해주었다. 감동한 호랑이는 그로부터 그 굴에서 스님, 동자와 함께 살며 개과천선하였다. 그 해 겨울 큰 눈으로 양식이 끊기자 스님이 탁발을 나섰는데 이때 스님은 호랑이에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살생은 하지 말라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러나 스님의 탁발이 보름이나 지체되자 굶주린 호랑이는 이산 저산으로 먹이를 구하러 다녔지만 모두 허사였다. 지친 몸으로 굴로 돌아오니 토끼가 굴 앞에서 조는 것이 보였다. 호랑이는 단순에 그를 낚아채 주린 배를 채웠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잡아먹은 토끼는 평소 그와 함께 석굴에서 스님의 심부름을 담당하던 동자승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호랑이는 울부짖으며 이산 저산 미친 듯 뛰어다니다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성암산 산신이 되고 동자와 스님은 성암 대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다음으로 조선 시대 이야기를 살펴본다. 옛날 조선 시대에 어떤 스님이 일찍이 인적이 드문 성암산 정상에 따로 암자를 세우고 그 암자를 범굴암이라 부르고 동자 하나를 데리고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스님이 암자를 비우면 어린 동자승은 홀로 암자를 지키며 스님이 돌아오시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어느 날 스님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비녀가 목구멍에 걸려 많은 고통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노스님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호랑이를 쳐다보며 아낙네나 잡아먹고 사람을 괴롭히는 사나운 짐승이라고 호통을 치며 목에 걸린 비녀를 뽑아주니 호랑이는 그제 서야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고개 숙여 참회를 하였다. 그래서 이 스님은 호랑이를 도로 불쌍히 여겨 범굴로 데리고 와 동자와 한식구가 되게 하였다. 그로부터 동자승과 호랑이는 친구가 되어 열심히 수행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동자승은 성암 대사가 되었으며 호랑이는 성암산 산신령이 되어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성암산 수호신이 되어 중생들의 등불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설이 전하는 가운데 임진왜란 때는 경산향교의 오성(五聖)의 위패를 강개명(姜開明)이라는 사람이 범굴에 숨겨두어 병화를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범굴의 이름을 ‘성암굴’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고 산의 이름도 ‘성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호환, 개과천선과 실수, 호랑이 숭배사상이다. 우리 설화에서 호랑이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호랑이 자체가 산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성암산 산신령의 거처 범굴」 설화에서는 호랑이의 개과천선을 다루는데, 첫째 신라 시대의 이야기에서는 탁발하러 간 스님을 기다리는 주체가 호랑이였으므로 사람을 잡아먹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었고 둘째 조선 시대 이야기에서는 스님을 기다리는 주체가 동자승이므로 호랑이가 호식할 가능성이 배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두 이야기 모두 결과적으로 호랑이가 성암산의 산신이 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 호랑이 숭배사상이 잘 드러난다. 호랑이 숭배사상은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 시대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鎭山)에서 도당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유구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