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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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재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의 역사.
[개설]
팔공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금호강이 관통하는 경산은 고대 압독국(押督國)의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는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승(高僧) 원효(元曉)가 배출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한 일연(一然)이 경산에서 탄생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자인현(慈仁縣) 출신의 재지 사족을 중심으로 유교 문화를 꽃피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기존 경산·하양·자인 지역이 통합되어 지금의 경산이 탄생하였으며, 대왕산(大旺山) 죽창의거와 같은 민족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선사]
경산 지역의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 유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인접한 대구 지역에서 석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고, 경산 지역의 지형과 지질 조건을 고려할 때 향후 발견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경산 지역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오목천과 남천 등이 관통하는 협곡평야 일대와 금호강변 일대에서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오목천과 남천 주변에 밀집된 형태로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과 선돌 유적이다. 최근까지 경산 지역에서는 모두 253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는데, 상당수가 오목천과 남천 주변의 용성면·남산면·자인면·남천면 일대에 분포한다. 또한 남산면 산양리에서는 취락 유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특이한 점은 금호강 주변 보다 오목천·남천 주변에 청동기 유적이 다수 분포한다는 것이다. 이는 치수(治水)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금호강 연안의 넓은 평야는 범람원이기 때문에 치수 능력이 부족했던 청동기 시대에 농경지나 주거지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다 내륙에 있고 관리가 수월한 협곡평야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청동기 시대 경산 지역은 고인돌과 선돌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한반도 남부에 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일련의 변화를 겪게 된다. 한반도 남부에 철기 문화가 유입되는 데에는 북부 지역에서 전개된 정치적 격변이 큰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2세기 초 위만(衛滿)은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古朝鮮)의 왕이 되었다. 몰락한 준왕은 자신의 추종 세력을 데리고 남쪽 한(韓)으로 내려와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이어 기원전 108년에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영역에다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고조선의 많은 유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두 차례에 걸친 고조선 세력의 남하는 ‘진국(辰國)’ 또는 ‘한(韓)’이라 불렸던 한반도 남부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새로운 세력의 등장으로 문화도 크게 변화하였다. 한반도 남부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고인돌 문화가 목관묘(木棺墓) 문화로 대체된 것이다. 목관묘 문화는 세형동검(細刑銅劍)을 비롯해 각종 철제 무기 및 농기구, 와질토기 등 앞선 시기보다 발전된 도구를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정치 세력에 의해 지금의 경산시 임당동, 옥곡동, 압량읍 신대리 일대에 목관묘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임당동 유적이 가장 큰 규모였는데, 임당동 유적에서 한나라 문화와 관련된 오수전(五銖錢), 한경편(漢鏡片), 칠기(漆器) 현악기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임당동을 거점으로 강력한 읍락국가인 압독국(押督國)[압량국(押梁國)]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압독국이 102년(파사이사금 23)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록,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106년 1월부터 3월까지 압독에 행차해 진휼했다는 기록, 지미왕[재위 112~134] 때 신라가 정벌하여 군(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 등이 병존하고 있다. 지금의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임당토성 유적 등이 압독국은 물론 신라에 편입된 이후 경산 지역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또한 218년 백제군이 장산성(獐山城)[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의 용산산성(龍山山城)으로 비정]을 포위 공격하자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반격하였던 사실이 전한다. 그렇지만 실제 압독국이 완전히 신라의 지배권 하에 들어간 것은 신라의 중앙집권화 이후로 보인다. 신라가 중앙집권화 하기 이전 시기 압독국은 신라와의 종속적 관계 속에 토착 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던 신라는 505년(지증왕 6) 주군(州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지금의 경산 지역의 경우 옛 압독국의 중심지에 압량군(押梁郡)이 설치되었다. 또한 압량군은 치성화현(雉省火縣)·마진량현(麻珍良縣)·노사화현(奴斯火縣) 세 개의 고을을 영현으로 두었다. 이 가운데 지금의 경산 지역에 있는 고을은 지금의 경산시 진량읍 일대로 비정되는 마진량현과 경산시 자인면·용성면·남산면 일대로 비정되는 노사화현이다.
삼국이 정립되면서 신라는 백제와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그 과정에서 경산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군이 대야성(大耶城)[경상남도 합천 지역]까지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자,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 군주(押粱州軍主)로 삼았다. 656년(무열왕 3)에는 김인문(金仁問)이 압독주 총관(押督州摠管)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당시 경산의 군사적 중요성은 현재 남아 있는 경산 병영유적(兵營遺蹟)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57년(경덕왕 16) 신라는 전국 주(州)·군(郡)·현(縣)의 명칭과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이 무렵 개편의 방향은 군현제 강화와 중국식 문물제도 수용에 따른 군현명 변경에 있었다. 이에 기존의 압독군은 장산군(獐山郡), 노사화현은 자인현(慈仁縣), 마진량현은 여량현(餘糧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고대 경산 지역은 문화의 중심지인 경주와 인접해 있어서 원효(元曉)[617~686]와 같은 고승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원효는 압량군 남쪽의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원효는 한국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며, 『금강삼매경론소(金剛三昧經論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을 찬술한 한국 불교 철학계의 최고 승려였다. 현재 경산 지역에는 원효와 관련된 사찰과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원효를 소재로 한 설화도 많이 전한다. 설총(薛聰)은 원효의 아들로서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한편, 경산의 팔공산은 통일 신라 시대에 국가제사인 중사(中祀)가 이루어졌던 신라오악(新羅五嶽) 가운데 ‘중악(中嶽)’ 혹은 ‘부악(父嶽)[아버지 산]’으로 중요시되었다.
[고려 시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940년(태조 23) 무렵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의 지방 행정 구역 개편은 8세기 경덕왕 때 구획된 지방 행정 구역을 계승하되, 후삼국 전쟁기 지방 세력, 즉 호족들의 공과(功過)를 감안하여 진행되었다. 호족 세력의 공과가 군현 통폐합과 승강(昇降)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런 가운데 기존의 장산군(獐山郡)은 장산군(章山郡)으로 개칭되었고, 자인현은 명칭을 유지하였다. 다만 여량현은 이 무렵 구사부곡(仇史部曲)으로 강등되었다. 강등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후삼국 전쟁기 이 지역 호족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995년(성종 14)에는 이전까지 문헌에 등장하지 않았던 하주(河州)에 자사(刺史)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에 앞서 983년(성종 2) 고려는 12목(牧)을 설치하였고, 처음으로 목사(牧使)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995년 12목을 12군(軍)으로 개편한 뒤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였다. 이 보다 작은 고을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練使)·자사·도호부사(都護府使)·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이는 994년(성종 13) 거란의 제1차 침입을 의식해 고을의 군사적 성격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하주가 설치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자사가 파견된 것은 이러한 군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1018년(현종 9) 행정 구역 개편이 다시 단행되면서, 고려의 주현(州縣)·속현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주는 하양현(河陽縣)으로 개칭되었으며, 장산군·자인현·구사부곡과 더불어 지금의 경주인 동경유수부(東京留守府)에 내속(來屬)되었다. 12세기 이후 지방관 파견이 늘어나면서 1172년(명종 2) 장산군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는데, 하양현도 비슷한 시기에 감무 파견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산군은 1308년(충선왕 복위 1) 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하자, 왕의 이름인 ‘장(璋)’을 피해, 고을명을 장산에서 경산(慶山)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317년에는 국사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하여, 현령(縣令)을 파견하는 ‘현’으로 승격하였다. 나아가 1390년(공양왕 2)에는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盧氏)의 고향이기에 지군사(知郡事)를 파견하는 ‘군(郡)’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개창 직후 환원되었다.
한편, 세 고을의 상위 행정구역도 지속적으로 변천되었다. 9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역행정 구역으로서 지방을 10도(道)로 구획하였는데, 이때 경산 지역은 영동도(嶺東道)로 편제되었다. 1106년(예종 1)에는 상위 행정구역으로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가 획정되었다. 이때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앙과 군현 간의 중간 기구인 이른바 5도 양계(五道兩界)가 성립되었다. 이어 1171년(명종 1)에는 경상주도(慶尙州道), 1204년(신종 7)에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에 소속으로 개편이 이루어졌다가,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를 거쳐, 1314년(충숙왕 1) 드디어 경상도(慶尙道)로 편제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고을 하부에 향(鄕)·소(所)·부곡(部曲)으로 일컬어지는 부곡제 영역이 있었다. 부곡제 영역에는 별도의 향사(鄕司)·소사(所司)·부곡사(部曲司)가 있었고, 여기에는 토착 세력인 향리가 있어 주읍 향리의 통제 하에 행정 업무를 처리하였다. 고려 시대까지 각 고을마다 부곡제 영역이 다수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명칭이 남아 있고 위치가 비정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려 시대 경산현과 자인현에 있었던 부곡제 영역은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구사부곡의 경우 조선 후기 자인현에 합속되기 전까지는 경주부에 속해 있었다. 하양현에는 안심소(安心所)·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이지부곡(貍只部曲)이 있었다. 그 외에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과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청통면 경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지은소(梨旨銀所)가 존재하였다. 이지은소는 원래 현이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고을이 폐지되고, 은(銀)을 바치는 ‘소’로 강등되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이지은소는 이지현(梨旨縣)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전기 신녕현(新寧縣)에 편입되었다.
고려 시대 각 고을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세력은 토성이족(土姓吏族)이었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토성으로 경산현에는 김(金)·전(全)·백(白), 하양현에는 허(許)·현(玄)·제(諸)·유(兪), 자인현에는 박(朴)·한(韓)·정(鄭)·주(周), 구사부곡에는 정(鄭)·석(石)·조(曺), 안심소에는 전(全)·신(申)·김(金)·박(朴)·허(許)·노(魯)씨가 각각 나타난다. 이들 토성이족 중 고려 말 조선 초 내우외환 속에 관직을 매개로 성장한 세력들은 조선 시대 재지사족 층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조선 시대]
조선왕조는 개국 초 문물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방 행정 구역도 개편하였다. 경산현은 고려 말 순비 노씨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가 파견되었으나, 1392년 개국 직후 다시 현령을 파견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하양현에는 감무가 파견되었는데, 1413년(태종 13) 대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 때 감무가 현감(縣監)[종6품]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경산현과 하양현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고을이 피폐해져 1601년(선조 34) 대구부(大丘府)에 병합되었다가, 1607년(선조 40) 복현(復縣)되었다. 자인현은 조선 전기까지도 여전히 경주부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자인 지역의 재지 사족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속현임에도 불구하고 1562년(명종 17) 자인향교(慈仁鄕校) 설립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또한 16세기 후반부터는 경주부에 비해 조세(租稅)·공부(貢賦)·요역(徭役) 등 각종 부세(賦稅) 문제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복현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자인현 사람들은 1584년(선조 17) 인근 경산현과의 합속, 1599년(선조 32) 대구부와의 합속을 각각 추진하게 되는데, 모두 경주부윤(慶州府尹)의 강력한 저지로 무산되었다. 1632년(인조 10)에는 유생 백렴(白濂)의 상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게 되고, 이듬해에는 방희국(方熙國) 등 자인현민 3백여 명이 대규모의 복궐상소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637년(인조 15) 결실을 맺어 복현이라는 명분으로 경주부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되고, 초대 자인 현감(慈仁縣監) 임선백(任善伯)이 파견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경산현·하양현·자인현 체제는 1895년 행정구역 개편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시대까지 경산 지역에 속했던 향·소·부곡은 고려 말 조선 초를 거치면서 모두 주읍(主邑)에 합속되었다. 먼저 안심소는 1394년 경상도 도관찰사 민개(閔開)의 보고에 따라 하양현에 속하게 되었다. 양량촌부곡과 이지부곡도 하양현에 합속되었는데, 그 시기는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된다. 구사부곡의 경우 1653년(효종 4)까지 경주부의 임내로 존재하였다. 이 시기 구사부곡 사람들의 생활권은 같은 경주부의 임내였던 자인현과 공유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637년(인조 15) 자인현이 경주부로부터 복현되자 구사부곡과 자인현 사람들이 상소를 올려, 구사부곡을 경주부에서 분리시켜 자인현에 합속할 것을 청원하였고, 1653년 건의가 받아들여져 구사부곡은 자인현의 북면(北面)이 되었다.
조선 시대 향촌사회를 주도했던 세력은 재지사족이다. 그런데 경산 지역의 주요 재지사족 가문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토성 보다 다른 고을에서 이주한 성씨들의 활동의 두드러졌다. 고려 말 조선 초를 거치면서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재지 사족 가문으로 성장한 가문이 적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산 지역 재지 사족 성장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임진왜란 때 지역 출신 의병들의 활약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산 지역은 일본군의 진격로인 대구와 영천, 그리고 경주 사이에 있었기에 일본군의 출몰과 약탈이 잦았다. 이에 경산 지역의 재지 사족들은 ‘절의(節義)’ 정신의 실천과 향촌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최응담(崔應淡)[최대기(崔大期)]의 『회당실기(晦堂實紀)』에 따르면 경산현에서는 1592년 5월 경산현령이 고을을 버리고 도망치자, 지역 재지 사족들이 발 빠르게 의병을 일으켰다고 한다. 최응담이 경산의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외에도 정변함(鄭變咸)·정변호(鄭變頀)·정변문(鄭變文)·박응성(朴應成)·박응량(朴應良)·진섬(陳暹)·진엽(陳曄)·남중옥(南仲鈺)·전락(全洛)·승적(承迪) 등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경산에 침입한 일본군을 대구에 편입된 욱수동 망월산성과 경산시 남천면 삼성리 연화봉(蓮花峯)에서 물리치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양현에서는 일명 ‘하양현 창의 8의사’라 불리는 신해(申海)·김거(金鐻)·허대윤(許大胤)·허경윤(許景胤)·박능정(朴能精)·박붕(朴鵬)·허응길(許應吉)·황경림(黃慶霖)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들은 4월 말 와촌 일대에 출몰한 일본군을 물리치고 무기를 빼앗았다고 한다. 자인현에서는 의병들이 의병장 최문병(崔文炳)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최문병은 4월 중순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후 5월초에 통문(通文)을 내어 창의할 인사와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당시 의병장으로 추대된 최문병은 휘하의 유인춘(柳仁春)·박영성(朴永晟)·권삼로(權三老)·이상(李祥)·김우용(金遇鎔)·이춘암(李春馣)·박몽량(朴夢亮)·김우련(金遇鍊)·최동립(崔東立)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최문병 부대는 오목천에 출몰한 적군을 물리쳤다. 또한 인접한 청도의 박경전(朴慶傳)의 부대와 함께 두곡(杜谷)·선암(仙巖)·가지현(佳旨縣) 등지에서도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경산현·하양현·자인현의 의병들은 이후 권응수(權應銖)의 부대에 합류하여 영천성 수복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다른 지역에서 개별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전란이 끝난 후에는 신해·최동립·최식(崔湜)·장몽기(張夢己)·김응룡(金應龍)·박연경(朴延慶)·박응량·이억수(李億壽)·이창후(李昌後)·전복명(田福命)·최결(崔潔)·최인수(崔仁壽)·최항(崔沆)·허경윤·허대윤·허응길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을 배출했던 가문들은 전란 후 향촌 복구 사업을 주도하며, 조선 후기 경산 지역을 대표하는 재지 사족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조선 후기 경산 지역의 대표 가문은 읍지류 자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먼저 경산현의 경우 토성 이외에도 초계 정씨(草溪鄭氏)·아산 장씨(牙山蔣氏)·밀양 박씨(密陽朴氏)·진산 진씨(珍山陳氏)·함양 여씨(咸陽呂氏)·함종 어씨(咸從魚氏)·해남 승씨(海南承氏)·청주 한씨(淸州韓氏)·달성 서씨(達城徐氏) 가문이 주요 가문으로 나타난다. 하양현에서는 조선 전기 허조(許稠) 일문이 명문벌족으로 성장하였으나, 그의 아들 허후(許詡)가 세조 등극에 반대하여 거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당함으로써 몰락했다. 대신 하양현에 남은 허씨들이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유지하게 된다. 그 외에도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장수 황씨(長水黃氏)도 유력 사족으로서 성장하였다. 토성이 전혀 성장하지 못했던 자인현의 경우 영천 최씨(永川崔氏)·성주 이씨(星州李氏)·경주 김씨(慶州金氏)·수원 백씨(水原白氏)·탐진 안씨(耽津安氏) 등의 가문이 재지 사족으로 활동하였다.
조선 시대 경산 지역의 교육 시설로는 1390년(공양왕 2) 건립된 경산향교(慶山鄕校), 1580년(선조 13) 건립된 하양향교(河陽鄕校), 그리고 자인향교가 있었다. 그러나 경산 지역의 재지사족들은 관학 이외에도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과 사우, 재사(齋舍)와 누정(樓亭) 등의 유교 시설을 경쟁적으로 건립하며 향촌 사회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교남지(嶠南誌)』에 따르면 경산현의 유교 시설로는 이황(李滉)과 정경세(鄭經世)를 제향한 고산서원(孤山書院)을 필두로 옥천서원(玉川書院)·송호서원(松湖書院)·상덕사(尙德祠)·영조재(永造齋)·친목당(親睦堂)·경재정(敬梓亭) 등이 존재하였다. 자인현에는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한 관란서원(觀瀾書院)과 최문병 제향의 용계서원(龍溪書院)을 비롯해 상덕사(尙德祠)·조곡사(早谷祠)·요산루(樂山樓)·맹구대(盟鷗臺)가 있었다. 하양현에는 금호서원(琴湖書院)·남호서원(南湖書院)·임호사(臨湖祠)·관유정(觀遊亭)·만고정(萬古亭)·애련재(愛蓮齋)·금포정(錦浦亭)·삼괴정(三槐亭)·청탄정(聽灘亭)·탁래정(濯來亭)·구연정(龜淵亭)·경모재(敬慕齋) 등이 확인된다. 특히 허조를 제향하는 금호서원의 경우 경산 지역 유일의 사액(賜額) 서원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았다.
인구의 경우 1425년(세종 7)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따르면 경산현은 318호에 3,049명, 하양현은 177호에 2,156명, 자인현은 237호에 2,226명, 하양에 속하는 안심소는 48호, 530명이었다. 이후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789년(정조 13)의 『호구총수(戶口摠數)』를 보면 경산현 3,431호 15,551명, 하양현 1,690호 7,079명, 자인현 3,220호 12,262명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고려 후기부터 지속된 농업 기술의 발달과 향촌개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농법의 발달에 따른 이앙법의 확대로 논농사의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경산 지역에서 이러한 경향은 관개(灌漑) 시설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1469년(예종 1)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경산현 18개, 하양현 15개[안심소 3개 포함], 자인현 33개[구사부곡 6개 포함]의 제언(堤堰)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제언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후대로 내려오면서 증설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18세기 경산현 38개소, 하양현 6개소, 자인현 105개소였으며, 19세기 초반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경산현 68개소, 하양현 9개소, 자인현 124개소로 증가하고 있다. 제언시설 확충을 통한 활발한 수리사업으로 토지의 활용도를 높여나갔던 것이다. 실제 경산 지역은 영천에 이어 경상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저수지를 확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농업 생산량의 증가는 조선 후기 상품유통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초엽 경산 지역에는 경산현의 읍내장(邑內場)[5·10일]과 반야촌장(磻野村場)[1·6일], 하양현의 읍내장[4·9일], 자인현의 읍내장[3·8일]과 송림장(松林場)[1·6일]이 각각 개설되어 운영되었다.
[개항기]
개항 이후 점진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은 1894년(고종 31) 근대적 제도 개혁 운동인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23부제가 설치되었다. 그 결과 경상도 소속의 경산현·하양현·자인현은 대구부(大邱府) 소속의 경산군(慶山郡)·하양군(河陽郡)·자인군(慈仁郡)으로 개편되고, 4등급 군으로 매겨졌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23부제 실시로 지방행정에 혼란이 생겼고, 결국 1년 만인 1896년(건양 1) 23부가 13도로 이루어진 도제(道制)로 환원되었다. 이때 경산군·하양군·자인군은 나란히 경상북도로 편제되었다.
개항기에는 근대문물의 유입과 열강의 침입, 봉건 체제의 위기 속에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경산 지역의 재지 사족들은 전통적 질서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하양현 출신의 허호(許浩)와 자인현 출신의 최기홍(崔基洪)은 1881년(고종 18)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반대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 참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기에는 하양현의 진사(進士) 황재찬(黃在瓚)이 대구 출신의 유생 채헌식(蔡憲植)과 함께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시행하며 동학농민군의 침범에 대비하기도 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되었다. 그 중에서 경산 지역의 경우 1905년(광무 9) 1월 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일본인 농업 이민이 늘어났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규모 농장이 설립되었다. 이처럼 경산 지역이 일제 침탈의 중심지가 되어 가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의병전쟁(義兵戰爭)과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과 같은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산 지역 항일 의병 활동은 1904년(광무 8)부터 확인된다. 이 무렵 자인과 하양의 화적(火賊)들이 경부선 철도와 초기 일본인 이주민을 공격하며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되는데, 경산 지역에서는 청도 운문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경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이 주목된다. 이에 1907년(융희 1) 11월 자인에서는 김세순(金世淳)이 거느린 의병 150명이 일본군과 교전한 바 있다. 또한 1908년(융희 2) 2월에는 하양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펼치던 이봉조(李鳳祚)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경산 지역의 대표적인 애국 계몽 운동 단체로는 1908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大韓協會) 자인지회(慈仁支會)가 있다. 또한 1907년 4월에는 경산군 일대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1906년(광무 10)부터는 정부의 「흥학조칙(興學詔勅)」에 의거해 전국적으로 근대식 학교가 대거 설립되었다. 이른바 신교육운동이라 불리는 학교 설립 운동은 경산 지역에서도 일어나, 1910년 무렵까지 경산군에 4개교, 하양군에 4개교, 자인군에 7개교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 행정 기구를 만들기 위해 1914년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경산군·하양군·자인군이 경산군으로 통폐합 되었으며, 이웃한 신녕군의 일부 지역도 흡수하였다. 그 결과 경산군은 경산면·안심면·하양면·고산면·압량면·와촌면·남산면·남천면·용성면·자인면·진량면 등 11개면으로 재편성되었다. 일제의 강점 이후 두드러진 경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일본인의 증가이다. 금호강 유역은 일찍이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이에 경부선 경산역과 대구선 하양역을 중심으로 이주 일본인이 증가하게 되는데, 일본인들은 농장 경영과 과수 재배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경산역은 일본으로 유출되는 곡물이 집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의 침탈이 지속되는 가운데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이 일제 강점기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경산에서도 뜻 있는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어 지역에서 또는 국내외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대 무단통치기 국내 독립운동은 비밀결사 활동이 주축을 이루었다. 경산 지역에서는 허병률(許秉律)과 서성용(徐聖鎔)이 191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광복회(光復會)와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 각각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경산 지역에서도 만세시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대신 경산 출신의 백남채(白南採)·백남규(白南圭)·김무생(金武生)·최경학(崔敬學)이 대구에서, 김기원(金基源)이 경주에서, 김성욱(金聲旭)이 영해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의 여파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필두로 해외에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런 가운데 1920년대 경산 지역에서는 허병률·김성로(金聖魯)·서동일(徐東日) 등이 해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자금모집과 독립군으로 편성할 청장년 모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는 청년운동·형평운동·소년운동·신간회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그 중에서도 경산 지역에서는 청년운동이 주목된다. 1920년대 대표적인 경산의 청년운동 단체로는 경산기독청년회(慶山基督靑年會)·자인청년구락부(慈仁靑年俱樂部)·경산청년회(慶山靑年會)·자인청년회(慈仁靑年會)·안심청년회(安心靑年會)·하양청년회(河陽靑年會)·하양여자친목회(河陽女子親睦會), 그리고 단일 단체인 경산청년동맹(慶山靑年同盟)이 있다. 이들 단체는 야학과 소작권 보호 등 지역 청년들의 계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전시체제로 전환하였다.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인적·물적·정신적 수탈을 감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경산 지역에서는 전시체제에 저항하는 항일운동이 전개되는데, 가장 주목할 것은 1944년 7월 강제징용에 반대한 청장년들이 일으킨 소위 대왕산 죽창의거(大旺山竹槍義擧)이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좌우익 대립 속에 정치적 혼란은 한 동안 지속되었다. 경산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세워져 신학근(申學根)이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점차 좌익 세력은 존립 기반을 상실해 갔다. 그런 가운데 일부 강경한 좌익 세력들은 팔공산 등지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1949년 빨치산에 의한 와촌면 박사리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 아군이 매우 불리한 형세였지만, 경산은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 이남에 있어서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평산동 코발트 광산에서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좌익 세력과 일반 군민들이 보도연맹(保導聯盟)에 반강제로 가입했었는데, 6·25전쟁 발발 직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천여 명 이상의 보도연맹원이 경찰과 군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경산 지역에서는 전후 복구사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1956년 7월 경산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에는 안심과 하양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81년 7월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안심읍과 고산면이 이탈하여, 경산군은 2읍 7면 1출장소 체제로 축소되었다. 1986년에는 용성면 육동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89년 1월 경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경산군의 행정구역은 1읍 7면으로 재편되었다. 전면적인 지방자치제 실시를 앞두고 1995년에 단행된 전국적 행정구역 개편 때 경산시가 경산군을 흡수하여 도농복합도시로 재탄생하였다. 1997년 11월에 진량면이 진량읍으로 승격되면서 2읍 6면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후 인구 증가가 지속되는 가운데 2020년 압량면이 압량읍으로 승격하여, 현재는 3읍 5면 7동[행정동] 체제이다
1960년대까지 경산은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금호평야와 산재한 분지에서 곡물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대구가 빠르게 성장하고 1980년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점차 위성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특히 1968년 영남대학교의 경산캠퍼스가 조성되면서 순차적으로 대구 지역의 대학교가 경산으로 이전해 오거나, 경산에 신설되었다. 또한 일반산업단지를 비롯해 지식산업지구 등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2012년에는 대구지하철 2호선이 경산까지 연장되며 전원도시·학원도시로서의 면모가 더욱 강해졌다. 이에 경상북도 여타 시·군과는 달리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20년 8월 현재 272,751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