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375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Joseon Dynasty period
이칭/별칭 옥산(玉山),인산(仁山),화성(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7년 - 자인현 복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 - 경산·하양·자인현을 군으로 승격

[정의]

1392년부터 1863년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현재의 경산은 조선 시대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자인현(慈仁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려 시대에 세 현은 경주부의 속현으로 있었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경산과 하양은 독립현이 되었다. 하지만 자인은 1637년(인조 15)까지 경주부의 속현으로 남아있었다. 경산·하양·자인은 현으로서는 규모가 작았기에 하양은 안심소를, 자인은 구사부곡을 소속시킴으로서 규모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 세 현의 인구는 조선 후기로 올수록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전답의 면적은 조선 전기와 비교하여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개시설의 규모와 수가 크게 증가하고, 논농사가 확대되면서 실제 수확량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토산공물 역시 조선 후기로 오면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물종이 바뀌거나 줄었으며, 19세기에는 현물을 납부하던 것에서 돈으로 대납(代納)하였다. 경산·하양·자인은 규모가 작았던 만큼 재지 사족의 수도 적고, 크게 번성한 가문도 없었다. 세 현의 토성들 보다는 다른 고을에서 이주해온 사족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다른 고을에서 이주해온 사족들은 임진왜란 당시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면서 임란 이후 향촌 사회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향교를 중건하고, 고산서원·옥천서원·금호서원·관란서원·용계서원 등을 건립하여 이들 기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하양의 금호서원은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행정 구획 개편]

고려 말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던 경산군은 1392년(태조 1)의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 종5품의 현령(縣令)이 파견되는 경산현이 되었다. 그러다 1532년(중종 27) 전범(全凡)의 살모사건(弑母事件)을 계기로 읍격이 종6품의 현감(縣監)이 파견되는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을이 탕진되어 하양현과 합치려는 논의가 있었으며, 1601년(선조 34) 대구부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체찰사 이덕형의 건의에 따라 하양·화원과 함께 대구부에 합속 되었다. 1607년(선조 40) 하양현과 함께 대구부에서 독립한 후 1895년(고종 32) 지방 행정 제도를 개편할 때까지 읍격을 유지하였다.

고려 시대 경주의 속현이었던 하양현은 1392년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현감이 파견되는 독립현이 되었다. 그러나 하양의 읍세는 경산현이나 경주부의 속현인 자인현에 비하여 열세에 있었다. 그래서 1394년(태조 3) 경상도 도관찰사 민개(閔開)의 건의로 경주부에 소속되어 있던 안심소(安心所)를 하양에 소속시켰다. 1601년(선조 34) 임진왜란의 여파로 경산현과 함께 대구부에 합속되었으나, 1607년(선조 40) 독립한 후 1895년까지 읍격을 유지하였다.

자인현은 1018년(현종 9)이래로 1637년까지 경주부의 속현으로 있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속현으로 있었던 것은 경주부의 재원 충당을 위해서였다. 자인은 고을의 규모나 재지 사족의 활동을 보더라도 일찍부터 독립현의 자격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속현이었던 자인에 1562년(명종 17) 향교가 건립된 상황에서도 알 수 있다. 이후 자인현의 사족들은 행정 처리의 불편과 경주부 사족에 비해 조세(租稅)·공부(貢賦)·요역(徭役) 등에서 부당함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경주부에서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584년(선조 17) 인근 경산현과의 합속 추진과 1599년(선조 32) 대구부와의 합속 추진으로 나타났는데, 모두 경주부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본격적으로 자인현 복현 운동이 전개된 것은 1632년(인조 10) 유생 백렴(白濂)의 상소부터였다. 이 상소 역시 경주부윤의 반대 상소로 무산 되자, 이듬해 방희국(方熙國)을 소두(疏頭)로 자인현민 3백여 명이 대규모의 복궐상소를 전개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무뢰배의 난동으로 규정하여 탄압하면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복현 청원은 꾸준하게 전개되어 1637년(인조 15) 결실을 맺고 경주부에서 독립하였다. 나아가 1653년(효종 4)에는 전우벽(田禹闢) 등의 상소로 구사부곡이 경주부에서 자인현으로 합속되었다.

[경제적 기반의 변화]

조선 시대 경산·하양·자인의 경제적 기반은 인구와 토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을별로 인구와 전답의 다소 및 비옥도, 농법의 발전 등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 1425년(세종 7)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보면 경산현은 318호(戶)에 3,049구[남 1,337구, 여 1,712구], 하양현 177호에 2,156구[남 1,087구, 여 1,069구], 자인현 237호에 2,226구[남 1,006구, 여 1,220구]로 경주부 속현인 자인이 하양보다 규모가 컸다. 그러나 하양현에 소속된 안심소의 48호, 530구[남 246구, 여 284구]를 합하면 자인보다 인구가 많았다. 이처럼 속현인 자인의 규모가 컸기에 경주부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자인의 독립을 반대했던 것이다.

한편, 1789년(정조 13)의 『호구총수(戶口摠數)』를 보면 경산 3,431호 15,551구, 자인 3,220호 12,262구, 하양 1,690호 7,079구로 확인된다. 조선 전기에 비하여 호구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1637년(인조 15) 복현된 자인현하양현에 비하여 호구수가 월등히 많다. 이런 현상은 19세기 말에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영남읍지(嶺南邑誌)』를 보면 경산은 3,165호 16,131구, 자인은 2,920호 12,882구, 하양은 1,750호 7,525구로 나타난다. 약 100년 사이 세 현 모두 호구수가 미세하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비하여 인구의 증가폭이 감소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래로 토지의 사용이 포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경산·하양·자인의 전결수는 15세기에 비해 19세기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조세 재원을 최소 한도로 파악한다는 정부의 재정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15세기 경산현은 개간(開墾) 전답(田畓) 3,479결 중 논[답(畓)]은 1,304결이며, 하양현은 개간 전답 2,216결 중 논은 738결이었다.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경상도읍지』에는 경산현의 전답 약 3,975결 중 논은 1,356결이며, 하양현은 2,557결 중 844결이 논이었다. 한편, 자인현은 속현이었기에 조선 전기 기록이 없지만 『경상도읍지』에는 2,991결 중 1,279결이 논이었다. 이는 경산현보다 작고, 하양현보다 큰 규모였는데 논의 규모가 경산현과 비슷한 것은 자인현에서 논농사가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실제 경산현하양현은 논과 밭의 비율이 1:2 정도지만 자인현은 1:1.3 정도로 밭농사가 많았으나 논농사도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농법의 발달과 이앙법의 확대로 논농사의 생산량이 2배 이상 증대했기에 전체적인 생산량은 이전에 비해 많이 증가하였다. 이런 농법의 변화는 관개(灌漑) 시설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1469년(예종 1)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따르면, 경산현에는 제언이 18개, 하양현에는 15개[안심소 3개 포함], 자인현에는 33개[구사부곡 6개 포함]가 설치되었다. 이들 제언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후대로 내려오면서 증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18세기 경산 38개소, 하양 6개소, 자인 105개소가 설치되었으며, 19세기 초반의 『경상도읍지』에는 경산 68개소, 하양 9개소, 자인 124개소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경산·자인의 제언시설 확충을 통한 활발한 수리 사업은 토지의 활용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하양은 조선 전기에 비하여 오히려 줄어든 경향을 보인다. 이는 하양이 금호강을 끼고 있는데다 평지에 위치해 있다는 지형 조건으로 인해 천방보다 평지에 물을 가두어 둘 수 있는 못[池]의 규모를 집중적으로 확충하는 방법을 채택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제언 규모가 평균 500~700척이었던데 비해 하양의 토산지(吐山池)는 약 4,400척, 다문리지(多文里池)가 약 2,100척에 이르고 있다는 점은 이 지역 수리 관개 사업의 특수한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19세기 말의 『영남읍지』 제언조를 보면 경산현에는 만세량보(萬世粱洑)·주보(住洑)·아현보(阿見洑)·적지보(赤旨洑)·옥곡보(玉谷洑)·아역보(衙役洑)·득산보(得山洑)·중보(中洑)·신보(新洑)·득수보(得水洑)와 격(擊)이 나온다. 격(擊)은 임시 가물막이로서 일종의 저수지로 추정된다. 하양현에는 만세보(萬世洑)·식송량(植松粱)·상신량(上新粱)·하신량(下新粱) 등이 나온다. 자인현은 포목보(柿木洑)·망보(望洑)·사월남보(沙月南洑)·유평보(油坪洑)·대시보(大鉃洑)·대위보(大位洑)·원당보(元堂洑)·덕토보(德吐洑)·가일보(駕日洑)·류등보(柳等洑)·은곡보(銀谷洑)·자라보(者羅洑) 등이 있었다. 이처럼 제언과 보 등의 관개 시설의 확충을 통한 수리의 안정적인 확보는 이앙을 활발하게 하도록 만들었고, 농업 생산성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 분업을 촉진시켜 농민들이 생산물을 시장에 판매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기 시장인 장시(場市)가 각처에서 활발히 설치되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각지에는 정기 시장인 장시(場市)가 활발히 개설되어 나갔다. 19세기 초 경산·자인·하양 일대에는 5개의 장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영천과 대구까지 하나의 연결망을 형성하여 유기적으로 운영되었다. 조선 후기 경산·하양·자인의 장시를 보면 경산에는 읍내장(邑內場)[5·10일]과 반야촌장(磻野村場)[1·6일], 하양에는 읍내장[4·9일], 자인에는 읍내장[3·8일]과 송림장(松林場)[1·6일]이 각각 개시되었다. 이 장시들은 개별적이고 고립 분산적이지 않고 장시끼리 연결되어 하나의 장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가로(街路)를 따라 경산 읍내장, 자인 읍내장, 송림장은 대구 부내장(府內場)[2·7일] 및 신장(新場)[4·9일]과 연결되어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였고, 하양·자인의 읍내장은 경산 반야촌장 및 영천 명구장(明球場)[5·10일]과 함께 또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시는 일종의 생활권역을 형성하면서 지역민들의 생활양식과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그들의 정치·사회활동이나 문화, 종교생활에 있어서도 하나의 범주와 단위를 이루었다. 이러한 점에서 경산·하양·자인이 하나로 통합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향촌 사회의 구조와 변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산현의 토성은 김(金)·전(全)·백(白)이며, 내성(來姓)으로서 풍각(豐角)에서 온 노(魯)씨, 속성(續姓)으로서 자인(慈仁)에서 온 박(朴)씨, 경주에서 온 정(鄭)씨 등이 있었다. 또한 중국[당]에서 귀화한 성씨로 서(徐)·유(劉)씨가 있었다. 김·전·백씨 등은 고려 초기 토성 분정 이래 경산현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던 성씨들이었고, 내성인 박씨와 정씨는 경산에 들어와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 하양현의 토성은 허(許)·현(玄)·제(諸)·유(兪)이며, 속성으로서 경주에서 온 김(金)씨가 있었는데, 향리가 되었다. 안심소(安心所)의 토성은 전(全)·신(申)·김(金)·박(朴)·허(許)·노(魯)씨가 있었다. 자인현의 토성은 박(朴)·한(韓)·정(鄭)·주(周)이며, 속성으로는 진도에서 온 임(任)씨와 가은(加恩)에서 온 변(邊)씨가 있었는데, 모두 향리가 되었다. 구사부곡의 토성은 정(鄭)·석(石)·조(曺)이고, 내성은 장산(獐山)에서 온 전(全)씨가 있었다.

1530년(중종 25)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산현에 일본에서 건너온 록(綠)·주(珠)의 양성이 추가되었다. 하양현은 임내인 안심소에 이(李)·최(崔)·형(荊)씨가 추가되고, 신녕현에 있던 이지현(梨旨縣)하양현에 내속되어, 이지현의 이·윤(尹)·안(安)씨가 추가되었다. 자인현은 경주부 속현으로 있었기에 이전과 변화가 없었다.

『장산지(獐山誌)』 성씨조에는 1679년(숙종 5) 경산 「향안(鄕案)」에 수록된 19개 성씨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6세기에 경산현에는 토성 이외에도 초계 정씨(草溪鄭氏)[정연(鄭珚), 고려말]·아산 장씨(牙山蔣氏)[장흥부(蔣興膚), 조선초]·밀양 박씨(密陽朴氏)[박해(朴晐), 조선초]·진산 진씨(珍山陳氏)[진하(陳夏), 세종대]·함양 여씨(咸陽呂氏)[임란전]·함종 어씨(咸從魚氏)[임란전]·해남 승씨(海南承氏)[승적(承迪) 임란시 입향]·청주 한씨(淸州韓氏)[한순(韓珣)·한경희(韓景禧), 임진왜란 시 내거] 등이 있었다. 이들의 성장 과정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경산현의 경우 토성 가운데 김씨와 전씨는 16세기 중반 이전에 사족과 이족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전백영과 도의로 교유하던 박해(朴晐), 이거(李琚)[하빈 이씨(河濱李氏)]의 일문도 향촌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박해는 밀양인으로 관직이 대사헌에 올랐으나 국사(國事)가 날로 흐려지는 것을 보고 경산 내매동에 은거했다. 밀양 박씨 일문은 박울(朴蔚)을 비롯해 그 아들인 박계조(朴繼祖)·승조(承祖)·찬조(纘祖)·순조(順祖)·현조(顯祖) 형제를 생진(生進)으로 배출함으로써 경산에서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 외에도 경산에는 진석산(陳碩山)·진가유(陳嘉猷)·진관(陳瓘)·진정(陳珽) 등과 장방도(蔣方道)·장자원(蔣自元) 등의 생진 및 관인을 배출한 진산 진씨와 아산 장씨도 조선 전기 유력 사족으로 있었다.

하양에서는 여말선초 허조(許稠) 일문이 출사(出仕)하여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허조는 황희와 더불어 세종조 정국을 주도하였는데, 그의 아들 허후(許詡)가 세조의 등극에 반대하여 거제(巨濟)의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당함으로써 몰락했다. 이를 계기로 허씨는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강화하며 사림파의 형성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양에는 윤자임(尹自任)과 황헌(黃憲) 등의 생진을 배출한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장수 황씨(長水黃氏)도 유력 사족으로서 성장을 발판을 마련했다.

자인은 경주의 속현이긴 했으나 한장군(韓將軍)놀이[여원무(女圓舞)]가 전승되고 그를 제향한 사당이 지어진 점으로 미루어 자인 한씨(慈仁韓氏)들이 향촌을 주도하는 사림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 중소군현의 토성들이 토호로서 외적을 격퇴한 공로를 배경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경향이 많았듯이 전설상의 한장군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편승한 토성 한씨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자인에는 중종조 박근손(朴謹遜)·최운수(崔雲水) 등 생진을 배출한 밀양 박씨와 곡강 최씨(曲江崔氏)도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 이래로 경산·하양 지역 토성이 강력한 족세(族勢)를 갖지 못하던 시기에 타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성씨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임란 당시 적극적인 의병 활동을 통해 확고한 재지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나아가 임진왜란 이후 쇠잔해진 읍세로 인해 병합 과정을 겪으면서 타읍에서 이주해오는 성씨들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주해온 성씨들은 기존의 사족들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자료가 없어서 확인이 어렵지만, 이들 사족들이 당시 여타 고을에서와 마찬가지로 「향안」을 복구하고, 소실된 향청과 향교, 서원 등을 재건하는 한편, 상·하민이 참여하는 향약·동약 등을 시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1605년(선조 38) 경산의 고산서재(孤山書齋)를 중건할 당시 도감(都監)에 정변함(鄭變咸)[초계 정씨]이, 유사에 여응주(呂應周)[함양 여씨]와 진현(陳晛)[진산 진씨]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경산에 정착하고 있던 가문의 인사들로서 전란 직후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향촌 사회 복구를 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633년(인조 11) 경산향교를 중수할 때에 서사선(徐思選)[달성 서씨]이 상소를 짓는다거나, 1690년(숙종 16) 고산서재를 승원(陞院)할 때 도감에 생원 한홍익(韓弘翊)[청주 한씨], 유사에 정세은(鄭世誾)·한두일(韓斗一)을 임명하였던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이주해온 사족들이 적극적으로 향촌 사회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기반이 크게 신장되었음을 알려준다. 실제 『장산지』에 수록된 경산 「향안」에는 임진왜란 이후 이거(移居)해 온 성씨로 달성 서씨(達城徐氏)[서사선(徐思選), 1604, 대구]·풍양 조씨(豐壤趙氏)[조계진(趙繼陳), 광해군대, 상주]·안동 권씨(安東權氏)[권숙(權俶), 인조대, 경기]·청주 정씨(淸州鄭氏)[정유약(鄭惟爚), 인조, 현풍]·밀양 박씨[박찬(朴燦)·박수(朴燧), 효종, 현풍]·동래 정씨(東萊鄭氏)[정현구(鄭賢耈), 효종, 대구]·현풍 곽씨(玄風郭氏)[곽흔(郭昕)·곽의지(郭義之), 현종, 현풍]·밀양 손씨(密陽孫氏)[손양복(孫陽復), 현종, 영천]·인천 채씨(仁川蔡氏)[채구령(蔡九齡)·채주하(蔡冑夏), 숙종, 대구]·밀양 박씨[박개한(朴開漢), 숙종, 청도]·이여집(李汝楫)[미상] 등이 확인된다.

한편, 경산·하양·자인의 재지사족들은 주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학통[한강·여헌학파]과 연계함으로써 퇴계학파의 일원을 형성하기도 했다. 뒤에 경산현에 이황을 제향한 고산서원(孤山書院)과 자인현에 이언적을 제향한 관란서원(觀瀾書院)이 각각 건립되는 점은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서사선·진섬(陳暹)·전극창(全克昌)·김응명(金應鳴) 등이 퇴계와 남명 사이를 왕래하며 활동한 정구(鄭球)에게서 수학한 바가 있듯이 남명학파와의 교류도 일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이 같은 학적·지연적 기반과 연대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며, 좌도뿐만 아니라 우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17세기 이래로 경산현·자인현·하양현으로 새로운 성씨들의 유입은 계속 증가하였다. 1933년에 간행된 『경산군지(慶山郡誌)』를 보면, 대구·청도·밀양·영천·의성·경주 등지에서 경산·자인·하양 등지로 이주가 활발하였는데, 그 결과 경산에는 78개, 자인에는 55개, 하양에는 31개의 성씨가 나타난다.

『교남지(嶠南誌)』 인물조를 보면 경산현에서 문과 4명, 무과 3명, 생원·진사 5명, 음사(蔭仕) 1명, 충의(忠義) 1명, 문사(文士) 14명 등 28명을, 자인현에서는 문과는 없지만 무과 5명, 생원·진사 1명, 음사 3명, 충의 5명, 문사 5명 등 19명을, 하양현에서는 문과 5명[허조 : 고려 공민왕대 등과], 무과 3명, 생원·진사 4명, 음사 6명, 충의 7명, 문사 12명 등 37명을 배출하였다. 이를 보면 하양이 경산·자인에 비하여 많은 인사가 배출되었지만 문사와 문과·생원·진사수로 보면 경산이 하양·자인에 비하여 문풍이 진작(振作)된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당시에는 자인과 하양현에서 많은 무신과 의병장들이 배출되었다.

인물조에 수록된 인사들을 성씨별로 보면 경산현에서는 진산 진씨·밀양 박씨·동래 정씨·순천 박씨·달성 서씨·인천 이씨·경주 이씨·청주 정씨·청주 한씨·성산 여씨 등 10개 가문, 자인현에서는 경주 이씨·김해 김씨·인천 이씨·영천 최씨·경주 김씨·성주 이씨·파평 윤씨·인동 장씨 등 8개 가문, 하양현에서는 하양 허씨·청도 김씨·영천 이씨·김해 김씨·장수 황씨·동래 정씨·성주 도씨·인천 채씨·경주 김씨 등 9개 가문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하양 허씨가 유일한 토성이며, 인물도 12명을 배출하여 세 고을의 성씨들 중 가장 많은 수이다. 뿐만 아니라 1790년(정조 14) 허조를 배향하는 금호서원(琴湖書院)이 세 고을에서 유일한 사액(賜額) 서원이 되면서 하양 허씨는 하양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 경산·하양·자인 지역에서는 이들 가문이 향촌 사회를 주도하는 가운데 여타 성씨들이 이주·정착하여 성장하면서 향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거나 협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이래로 향촌 사회에서의 향권을 둘러싼 사족들 간의 분쟁이 확대되어 가자,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조상[현조(顯祖)]의 현양(顯揚) 사업이 이어졌다. 18세기 중반 이래로 문중 서원과 사우 및 재사(齋舍), 누정(樓亭)의 건립과 족보와 문집·실기의 간행이 증가한 것이 그런 이유였다. 일례로 『교남지』에 의거하면 경산에는 고산서원·옥천서원(玉川書院)·송호서원(松湖書院)·상덕사(尙德祠)·영조재(永造齋)·친목당(親睦堂)·경재정(敬梓亭) 등이 있었다. 자인에는 관란서원(觀瀾書院)·용계서원(龍溪書院)·상덕사(尙德祠)·조곡사(早谷祠)·요산루(樂山樓)·맹구대(盟鷗臺)가 있었으며, 하양에는 금호서원·남호서원(南湖書院)·임호사(臨湖祠)·관유정(觀遊亭)·만고정(萬古亭)·애련재(愛蓮齋)·금포정(錦浦亭)·삼괴정(三槐亭)·청탄정(聽灘亭)·탁래정(濯來亭)·구연정(龜淵亭)·경모재(敬慕齋) 등이 확인된다.

그러나 경산·자인·하양은 여타 고을에 비하여 서원이나 사우의 수가 많지 않다. 이것은 서원이나 사우에 제향할 만한 인물이 적다는 것이 한 원인이었다. 누정도 재지 사족 보다는 지방관이 건립한 것이 많았다. 이러한 문중 내지 가문별 우위 경쟁은 19세기 이후 더욱 복잡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현달한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효자·효녀·효부·열녀·열부 등의 정려(旌閭)·표창(表彰) 등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도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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