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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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夢龍 |
영어공식명칭 | Kim Mongryong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감병훈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효자.
[개설]
김몽룡(金夢龍)[1734~1801]은 노모의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잘라 목숨을 연명시켰다.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되었다.
[가계]
김몽룡의 본관은 김해(金海)로, 경상도 자인현(慈仁縣) 출신이다.
[활동 사항]
김몽룡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80세 되던 해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흘린 피를 어머니에게 드리고 며칠간 더 연명시켰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묘에 합장을 시켰는데, 자신의 왼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아버지 무덤으로 흘러 보냈다고 한다. 상중(喪中)에는 항상 부모님의 묘소를 지켰고, 자신의 몸을 해칠 정도로 곡을 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 중 가난한 이웃이 상을 당하면 나무 관과 곡식 등을 부조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효행와 선행이 알려져 1781년(정조 5) 자인현감(慈仁縣監) 류운우(柳雲羽)가 김몽룡을 찬양하는 증시(贈詩)를 써주기도 하였다. 김몽룡은 고을의 이방(吏房)·호장(戶長)을 역임하면서도 청렴하였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김몽룡의 집안이 가난하여 김몽룡 사후에 미처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는데, 이에 자인현감이 관과 삼베, 종이 등을 보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고을 사람들이 김몽룡의 효행에 대한 포장(褒獎)을 청원하였고, 그 결과 자인현감 민종혁(閔宗爀)[1762~1838]에 의해 집안이 복호(復戶)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