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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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Korean wrestling |
이칭/별칭 | 각저,상박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유신 |
재현 시기/일시 | 매년 명절 - 씨름 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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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장소 | 자인계정숲 씨름장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68 |
성격 | 민속놀이|스포츠 |
노는 시기 | 단오, 추석, 백중 등의 세시 명절 |
[정의]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전해지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이자 운동경기.
[개설]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잡은 채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어,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는 전통 민속놀이이다. 씨름은 ‘씨룬다’[서로 버티고 힘을 겨룬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용어로 볼 수 있으며, 다른 이름인 각저(角觝), 백희(百戲), 각기(角技)라는 용어들 역시 ‘맞닥뜨려 다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옛 중국 문헌에서는 우리의 씨름을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撩跤)’[종아리를 붙들고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놀이]로 불렀다. 전통사회에서 씨름은 계층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고루 즐기던 놀이였으며, 단오, 추석, 백중 등에 행하는 세시풍속이자 명절놀이로 전승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경산시 지역에서도 스포츠 경기로서, 명절 민속놀이로서 씨름이 치뤄진다.
[연원]
우리나라에서 씨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저총의 씨름 그림은 무덤 주인의 널방 동쪽 벽에 그려져 있는데, 두 사람의 씨름꾼과 한 사람의 구경꾼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씨름이 두 사람이 즐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심판이 주재하는 공식적인 경기였음을 암시한다.
고려 시대에는 원 간섭기에 씨름이 집중되어 나타났다. 왕과 내시는 각저희(角觝戲)라는 연희를 즐겼는데, 씨름대회 형식의 공연이나 행사를 통해 나른해진 심기를 달랜 것이다. 공민왕 때에는 씨름을 잘 하면 관직을 얻기도 했다. 이는 씨름이 주요한 병술(兵術)로 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 들어 씨름은 궁중부터 민간까지 널리 행하는 운동 종목이자 놀이가 되었다. 이 시기 씨름의 특징으로 절에서 승려들이 씨름을 즐겼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승려들은 수시로 병력이 되어야 했으므로, 무예를 연마하는 차원에서 씨름을 한 것이다. 사찰씨름은 주로 단오에 베풀어졌으며, 직지사(直指寺)의 사례를 보면 수백, 수천 명이 모여 즐겼다고 한다.
[놀이 도구 및 장소]
1. 놀이 도구
과거의 씨름은 특별한 도구 없이 맨손과 맨몸으로 하였는데, 근대화 작업을 거치면서 샅바를 도입하게 되었다. 샅바는 씨름할 때 넓적다리와 허리에 매어 상대편의 손잡이로 쓰는 헝겊으로 씨름에 사용되는 튼튼한 끈을 말한다.
현재 대한씨름협회에서 규정하는 공인샅바는 고리를 10㎝로 하고, 끝부분은 20㎝ 박음질로 마감하며, 흰색 한글로 선수 이름을 표기한다. 단, 초·중·고등부에 한하여 선수 이름을 대신하여 등록 단체명과 체급을 표기 할 수 있다. 초등부는 폭 100㎝, 길이 허벅지 둘레+허리 둘레+100㎝이고, 중·고등부는 폭 120㎝, 길이 허벅지 둘레+허리 둘레+100㎝로 한다. 또한 대학·일반부는 폭 140㎝, 허벅지 둘레+허리 둘레+110㎝로 규정하고 있다.
2. 장소
조선 시대에는 전문적인 씨름장이 없었으며 자연 공간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씨름은 왕이 즐기던 유희 종목 중 하나였으므로 왕이 뱃놀이를 간 저자도의 강변 모래판, 모병과 열병을 행하는 모화관 앞, 남산 아래, 고려 궁궐인 만월대 앞 등 다양한 장소에서 행해졌다. 또한 씨름은 민간에서 널리 행해지던 놀이였으므로 시장이나 마을 공터 등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공간에서 씨름판이 수시로 열렸다.
현재 대한씨름협회에서 규정하는 씨름경기장은 크게 모래경기장과 매트경기장으로 나뉜다. 모래경기장은 높이 30~70㎝, 넓이 직경 8~10m, 모래판 주위의 보조경기장은 1.5m로 규정된다. 매트경기장은 높이 10~20㎝, 넓이 직경 8~10m, 매트 주위의 보조경기장은 3m로 규정된다. 씨름경기장은 모래를 원칙으로 하며, 경기장 사정에 의해 매트로 할 수도 있다.
[놀이 방법]
먼저 승부를 겨룰 두 사람은 샅바를 매고 마주 꿇어 앉는다. 그런 다음 서로 어깨를 맞댄 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샅바를 먼저 잡고, 왼손으로 상대방의 허벅다리샅바를 잡는다. 양쪽이 서로 샅바를 잡고 경기에 임할 준비가 되면, 심판의 구령에 따라 동시에 허리를 펴고 일어나면서 시합이 시작된다. 두 사람이 샅바를 잡고 서로 버티어 힘을 겨루다가, 상대편을 먼저 넘어뜨리는 쪽이 승부에서 이긴다. 이때 무릎 이상의 신체가 먼저 땅에 닿는 사람이 지게 된다.
씨름 기술은 손기술, 다리기술, 발기술, 허리기술, 들기술, 혼합기술로 나누어진다. 손기술에는 앞무릎치기와 앞무릎짚기, 다리기술에는 밭다리걸기와 안다리걸기, 발기술에는 호미걸이와 뒤축걸이, 허리기술에는 왼배지기와 오른배지기, 들기술에는 들어튕겨배지기와 후려던지기, 혼합기술에는 뿌려치기와 끌어치기 등 분야별로 매우 다양한 기술들이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경산시 자인면에서는 예로부터 단오절에 한 장군 추모제사를 모신 후 여원무와 무당굿, 씨름, 그네뛰기 등 다채로운 민속으로 3~4일을 즐겼다. 과거에는 자인 장터에서도 남성 주민들이 참가하는 씨름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자인단오’가 경산의 대표적인 지역 축제로 나아가기 시작한 2002년에는 경산시씨름협회에서 장사씨름대회를 유치하면서 이에 수반하는 예산이 대폭 증가하여 자인 계정숲 내에 씨름경기장이 조성되었다. 경산자인단오제의 씨름대회는 시기별로 명칭을 바꾸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 대회를 통해서 국내 씨름계의 유명한 장사와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경산시의 대학 씨름부로는 영남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들 수 있다. 영남대학교 씨름부는 1954년에, 대구대학교 씨름부는 1984년에 창단되었다. 영남대학교 씨름부는 국내 최초로 창단되어 1980년대 홍현욱 선수와 2000년대 하상록 선수, 황규철 선수 등 뛰어난 장사급 선수들을 배출하였다.
[현황]
씨름은 1980~90년대 라디오와 TV생중계를 통해 인기 스포츠로서의 지위를 누렸으나, 1990년대 후반에 경기침체로 인해 프로씨름단이 해체되면서부터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최근 들어 온라인 영상 플랫폼인 유튜브에서 씨름대회 경기 영상이 조회수 100만을 넘기며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씨름 열풍에 힘입어 TV예능 프로그램[2020년 「씨름의 희열」]이 편성되어 씨름의 부흥을 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