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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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履德 |
영어공식명칭 | Kim Ideok |
이칭/별칭 | 사강(士綱),송정(松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764년 - 김이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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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23년 - 김이덕 육영재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1846년 - 김이덕 사망 |
출생지 | 김이덕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
묘소|단소 | 김이덕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서사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대표 관직|경력 | 하양향교 도유사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학자.
[개설]
김이덕(金履德)[1764~1846]은 하양 출신의 학자로 1823년(순조 23) 육영재(育英齋) 설립을 주도하였다.
[가계]
김이덕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강(士綱), 호는 송정(松亭)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김거(金鐻)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김달원(金達遠), 어머니는 정동교(鄭東喬)의 딸 연일 정씨(延日鄭氏), 할아버지는 김태진(金兌珍), 증조할아버지는 김정욱(金鼎旭), 부인은 하덕윤(河德潤)의 딸 진주 하씨(晉州河氏)이다. 김이덕의 김해 김씨 가문은 9대조 진사(進士) 김세위(金世緯) 대에 경기도 장단에서 하양으로 이거해 왔다.
[활동 사항]
김이덕은 1764년(영조 40)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송내리(松內里)[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과업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다. 1805년(순조 5) 가산산성(架山山城)의 환곡이 하양현에 과중하게 부과되자, 관아에 부당함을 건의하여 환곡을 견감시켰다. 1807년(순조 7) 경상도관찰사 윤광안(尹光顏)이 도내 사림과 함께 대구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할 때, 중빈(衆賓)으로 참여하였다. 1807년(순조 7) 가야산(伽倻山)을 찾아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지낸 홍낙교(洪樂敎)와 학사대(學士臺)를 유람하였다.
1814년(순조 14) 홍시제(洪時濟)가 신유사옥으로 관직이 추탈된 채제공(蔡濟恭)의 무고를 주장하다 기장현(機張縣)에 유배되자, 홍시제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1822년(순조 22) 하양향교 도유사(都有司)로 있으면서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823년(순조 23)에는 하양현감 이태승(李台升)의 지원을 받아 허장(許樟)·채석리(蔡碩履) 등 고을 선비들과 함께 육영재를 설립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이덕의 문집으로 『송정유집(松亭遺集)』 2권 1책이 전한다. 권1 시(詩)에 수록된 「관덕당향음주례후정윤방백(觀德堂鄕飮酒禮後呈尹方伯)」은 1807년 향음주례에 참여했던 김이덕이 경상도 관찰사 윤광안에게 올린 시이며, 「증홍승지(贈洪承旨)」는 기장현에 유배와 있던 홍시제에게 보낸 것이다. 기(記)에는 가산산성 환곡의 폐단에 대해 쓴 「가산창환미견폐기(架山倉還米蠲弊記)」가 수록되어 있다.
[묘소]
김이덕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서사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