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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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尙北道邑誌慶山郡河陽郡慈仁郡邑誌 |
영어공식명칭 | 『Gyeongsangbuk-do Eupji』「Gyeongsan-gun·Hayang-gun·Jain-gun Eupji」 |
이칭/별칭 | 경산군읍지,하양군읍지,자인군읍지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1899년 편찬된 경상북도 경산군·하양군·자인군의 읍지.
[개설]
1899년(광무 3) 전국 읍지 편찬 사업의 일환으로 경산군·하양군·자인군 세 고을에서 편찬한 읍지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는 「경산군읍지」와 「하양군읍지」가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1899년에 편찬한 251종 311군 312개의 읍지가 소장되어 있다. 한성부와 강원도 전체, 경상북도 경주군, 평안북도 영변군, 함경남도 함흥군의 읍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저자]
『경상북도읍지』 「경산군·하양군·자인군 읍지」 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경산군수 정도원(鄭道源), 하양군수 류기수(柳沂秀), 자인군수 이민성(李敏星)이 각각 편찬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1899년 4월 대한제국 내부(內部)는 전국 각 고을의 지(誌)와 지도(地圖)를 각 2건씩 정서하여 올리라는 읍지수상령(邑誌修上令)을 내렸다. 이때 경상북도에서 경산군·하양군·자인군을 비롯해 관내 각 고을의 읍지를 수합해 수상(修上)하였다.
[형태/서지]
「경산군읍지」는 3장 필사본으로 경산 지역 읍지 가운데 내용이 가장 빈약하다. 검은 색 인찰공책지에 장당 20행이지만 자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표제와 내제 모두 ‘경상북도경산군읍지’이다. 「하양군읍지」는 11장 필사본으로 붉은 색 인찰공책지에 장당 20행 20자이며, 표제와 내제 모두 ‘경상북도하양군읍지’이다. 「자인군읍지」는 16장 필사본으로 검은 색 인찰공책지에 장당 20행 23자이며, 표제는 ‘경상북도자인군읍지지도(慶尙北道慈仁郡邑誌地圖)’이고 내제는 ‘자인읍지’다. 표지 우측상단에는 백색 종이가 붙여져 있는데, 각각 제30호, 제5호, 제34호의 일련번호를 적어 놓았다.
[구성/내용]
「경산군읍지」는 1면의 지도를 시작으로 건치연혁·군명·관직·전답·민호·인구·방리·산천·읍성·공해·객사·임수(林藪)·학교·단묘·불우·누정·도로·교량·제언·장시·토산·풍속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2장에 불과하며, 이전 읍지 중 일부 내용만을 발췌해 놓았을 뿐 생략한 항목이 많다. 당시 민호와 인구는 1,975호 7,355명인데, 1831년의 3,025호 14,272명의 절반 정도이다. 방리조에는 5개 면(面) 102개 동(洞), 제언조에는 제언 54곳, 천방(川防) 6곳이라는 수치만 기록되어 있다. 임수(林藪)에는 경림(瓊林)과 금포림(錦鋪林)을 기재하였는데, 1832년에 편찬한 『경상도읍지』에는 경림만 실려 있었다.
「하양군읍지」는 하양군지도·건치연혁·현명(縣名)·관직·성씨·산천·풍속·방리·도로·교량·제언·전결(田結)·부역·봉름·토산·진공·군병·봉수·창고·조적(糶糴)·교원(校院)·단묘·공해·장시·역원·환적·과제(科第)·인물·서적(書籍)·고적·누정제영·사찰·형승·비문(碑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 내용은 1786년에 편찬한 『경상도읍지』 내 「하양현지」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다만 방리조에 수록한 호구의 수치를 1,366호(戶), 남자가 2,614명, 여자 1,998명으로 변경하였고, 교원조에서는 1871년 조령(朝令)으로 금호서원(琴湖書院)이 훼파(毁破)된 사실, 환적조에서는 1897년 부임한 류기수까지를 추가해 놓았다. 사찰에서는 환성사(環城寺)가 공산(公山)에 있다는 것만 밝히고, 신림사(新林寺)와 남태사(南泰寺)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였다.
「자인군읍지」는 1832년에 편찬한 『경상도읍지』를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생략하거나 보충한 것이다. 본문은 2면의 경상북자인군읍지지도를 시작으로 건치연혁·군명·관직·성씨·산천·풍속·방리·호구·전부·전세·대동·균역청·균세·요역·군액·성지[무(無)]·임수[무]·창고·군기·관애[무]·진보산성[무]·봉수[무]·학교·단묘·불우·공해·누정·도로·교량[무]·도서[무]·제언·역원·장시·목장[무]·형승·고적·토산·진공·봉름·관적·인물·제영·비판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적은 1899년에 부임한 이민성까지 기록되어 있다. 호구는 신묘식(辛卯式)으로 2,920호, 12,882명인데, 1832년의 『경상도읍지』에 3,246호, 12,69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신묘년은 1891년에 해당한다. 1832년 『경상도읍지』와 비교해 보면, 건치연혁·불우·공해·누정·비문의 내용이 일부 생략되었으며, 단묘조에는 일한묘(一韓廟)·조곡사(早谷祠)·구연사(龜淵祠)가 추가되어 있다. 인물도 12명에서 41명으로 증가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읍지』 「경산군·하양군·자인군 읍지」 는 1899년 대한제국의 통치체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행정정보를 새로이 확보하기 위하여 편찬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경산 지역의 행정·경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