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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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山靑年會 |
영어공식명칭 | Gyeongsan Youth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 단체.
[개설]
경산청년회(慶山靑年會)는 경산 지역 청년 계몽을 위하여, 경산기독청년회(慶山基督靑年會)를 배경으로 1921년 10월 17일 창립된 청년운동 단체이다.
[설립 목적]
경산청년회는 청년 계몽을 위한 노동야학의 개설과 문맹퇴치 등 각종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창립하였다.
[변천]
경산청년회는 1927년 경산청년동맹(慶山靑年同盟) 창립과 함께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산청년회는 1921년 10월 17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회규(會規)를 정하였다. 이후 1921년 11월 5일 경산공립보통학교에서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11월 12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정기총회에서 회장 안병길(安炳吉), 부회장 김사숙(金士淑), 총무 황해성(黃海性), 지육부장 최태운(崔泰雲), 덕육부장 이상진(李相鎭), 체육부장 박능준(朴能俊)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고 회원점명회록 낭독 및 세칙 통과가 이루어졌다. 이어 김구(金坵)의 「경산청년회원(慶山靑年會員)에게 망(望)함」, 이명석(李命錫)의 「신앙생활(信仰生活)의 위력(偉力)」, 이선애(李善愛)의 「우리 청년(靑年)의 금일(今日)」 등의 강연이 있었다.
경산청년회는 창립 초기에 지육부·덕육부·체육부를 두고, 강연회를 개최하여 청년들을 계명시키는데 주력하고 각 면(面)과 촌(村)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집중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 활기를 띠었던 경산청년회는 민족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의 분리·대립이 계속되고, 사회주의 청년운동이 민족주의 청년운동을 압도해 나가는 상황 속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전국대회가 무산된 이후 점차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 이후 민족주의 진영의 청년운동은 와해되었고, 사회혁명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계급 투쟁을 행동 강령으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27년 3월 30일 청년회관에서 지주간담회를 개최하였다. 이 간담회에서 협의된 사항은 ‘자급 비료 증식에 관한 건, 벼의 품종선택에 관한 건, 비료자금 운용에 관한 건’ 등이었다.
경산청년회는 1927년 6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제(會長制)에서 집행위원제(執行委員制)로 조직을 개편하고, 집행위원으로 장한우(張漢羽)·이상호(李相鎬)·박능진(朴能俊)·김상호(金相鎬)·안태섭(安泰燮) 등을 선출하였다. 1927년 7월 현재 회원은 77명이며, 집행위원은 9명이었다.
경산청년회의 활동 중 주목되는 것은 노동야학 개설이다. 경산노동야학의 교과목은 수신(修身)·조선어(朝鮮語)·일어(日語)·산술(算術)이며, 강사는 정덕진(鄭德辰)·김창우(金昌瑀)·안태섭·송유호(宋有鎬) 등이 선임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산청년회는 소작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지주간담회를 실시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청년운동 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