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화로 사라진 동성마을의 기억, 경산 사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1785
한자 都市化-同姓-記憶慶山巳洞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사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언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사동과 사동마을에서 전개된 문중활동에 대한 기억.

[개설]

20세기 전반 실시된 한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마을 중 동성마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가량이었다. 역사적으로 동성마을은 조선 후기인 17세기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 변동 과정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과 예학(禮學)의 발달, 종법적(宗法的) 가족제도의 수용 및 상속제도의 변화 속에 양변적 친족 관행이 부계친족 중심으로 변화함에 따라 동성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시 친족 체계의 변화는 기성 사족의 정치·경제적 기반의 약화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는데, 이처럼 약화된 입지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부계친족 중심의 족적 결속을 도모하면서 동성마을이 보편화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역학관계 재편 과정에서 확산된 동성마을은 동성집단의 위상 제고를 위한 다양한 문중활동의 결과였다. 당시 향촌사회에서 경쟁적으로 전개된 문중활동으로는 족계(族契) 창립, 종가(宗家) 운영과 사당 건립, 학계(學契) 결성, 누정과 재실의 건립, 서원·사우의 건립과 운영, 족보와 문집의 발간, 정려(旌閭) 포장(褒獎)과 추증 등과 같은 위선(爲先) 사업을 비롯하여, 현조(顯祖)의 학문과 유지를 계승하는 교육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 경산현(慶山縣)은 명현거유(名賢巨儒)의 고장은 아니었지만, 향교와 서원을 통한 유림활동과 족계 결성을 통해 문중활동을 지속해온 다수의 동성집단과 동성마을이 존속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거대도시로 성장한 대구광역시의 시세(市勢) 확장 영향을 크게 받아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대구광역시에 인접한 옛 경산현 지역에서는 택지개발사업이 이루어졌다. 택지개발 과정에서 조선 후기 경산 지역을 대표했던 몇몇 동성집단이 어우러져 세거해 오던 사동마을도 해체를 피할 수 없었다.

[옛 경산의 주요 가문]

조선 후기 경산현을 대표했던 4대 가문이 있었는데, 바로 초계 정씨(草溪鄭氏)·아산 장씨(牙山蔣氏)·청주 한씨(淸州韓氏)·달성 서씨(達城徐氏)이다. 이들 동성집단의 위상과 활약상은 조선 후기 이후 편찬된 각종 지지류(地誌類)와 경산향교 및 관내 서원의 인적 구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장산지(獐山誌)』에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연간 작성된 「향안(鄕案)」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네 가문 가운데 초계 정씨는 고려 말, 아산 장씨는 조선 초, 그리고 청주 한씨달성 서씨임진왜란 이후 경산 지역에 입향하였다. 이들 성씨가 경산현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향교와 서원에서 전개된 유림활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경산향교는 1390년(고려 공양왕 2) 창건되어, 1550년(명종 5) 중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훼손된 이래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633년(인조 11)에 이르러 중수하였고 1681년(숙종 7) 이건되었다. 경산향교 관련 자료로는 1680년(숙종 6)과 1689년에 작성된 「경산관유안(慶山官儒案)」과 중수 기록이 남아 있다.

유안에서 양반의 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액내(額內) 교생, 중수 당시 공사를 주도했던 조성도감(造成都監) 및 유사와 교임 등에는 앞서 네 가문 출신 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한편, 경산현의 대표 서원이었던 고산서원(孤山書院)의 운영을 주도했던 세력도 위의 네 가문이었다. 고산서원은 1690년(숙종 16)에 창건된 서원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제향하였다. 고산서원 창건과 동·서재 중수 때 공사를 주도했던 여러 도감(都監)의 명단, 1868년(고종 5) 고산서원이 훼철되고 세운 유허비(遺墟碑) 속의 명단에도 역시 네 가문 출신의 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초계 정씨, 아산 장씨, 청주 한씨, 달성 서씨 네 가문이 늦어도 17세기 이후부터는 옛 경산 지역의 향론을 주도하던 명문 가문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동마을의 세 동성집단]

사동마을은 지금의 경산시 동부동[행정동]에 소재한 두 곳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 지난 2004년 경산시의 시세 확장에 따른 택지개발사업으로 사라졌다. 뱀골로 불렸던 사동마을은 큰 사동[큰 뱀골]과 작은 사동[작은 뱀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두 자연촌락에는 옛 경산의 동성집단이 세거하였다.

사동마을에는 옛 경산 지역을 대표했던 네 가문 가운데 아산 장씨를 제외한 청주 한씨 절도공파(節度公派), 달성 서씨 현감공파(縣監公派), 초계 정씨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후손들이 약 400년 동안 거주해왔다. 이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청주 한씨는 조선 전기 병마절도사를 지낸 절도공 한만손(韓萬孫)의 후손들이다.

한만손은 연산군 때 중앙 정계의 혼란함을 등지고 처가인 성주에 은거하면서 경상도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경산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입향조로 여기는 인물은 임진왜란 때 성주에서 경산시 상방동으로 피난해 온 한만손의 증손 고봉(鼓峰) 한순(韓詢)이다. 한순은 학식이 높았으며 나중에 군자감 직장이 된 것을 계기로 직계 후손들이 청주 한씨 직장공파를 형성하였다.

청주한씨 경산파 대종회 격인 직장공파 성원들은 다시 6개 지파로 분파되었는데, 사동마을을 비롯하여 경산시 갑제동·조영동·평산동 일대와 남천면 금곡리에 주로 세거하며 동성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었으나 과거에 경산이었던 매호동과 금강동 일대에도 일부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청주 한씨 다음으로 다수를 이룬 가문은 달성 서씨이다. 달성 서씨 가문은 달성 서씨 9대 지파 중 종파인 현감공 서제(徐濟)의 후손들이다. 달성 서씨의 경산 입향조는 서제의 6세손으로 대구 지역의 거유였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종제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이다. 현재 서사선의 후손 대부분은 경산시 상방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사동마을의 달성 서씨의 입향조는 서사선의 종제인 서사건(徐思建)의 손자 서문태(徐文泰)이다. 이때가 지금으로 대략 300년 전이다. 사동마을의 달성 서씨들은 서사선 후손들과는 별개로 ‘달성 서씨 경산 사동 냉정 종회’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시 서문태의 장남과 4남의 후손들이 각기 지파를 형성하고 있다.

경산의 초계 정씨는 시조 정배걸(鄭倍傑)의 4세손으로 대제학을 역임한 정윤기(鄭允耆)를 중시조로 하는 대제학공파의 후손들이다. 초계 정씨 5대 종파 가운데 하나인 대제학공파는 다시 경산파, 초계·진주파. 그리고 관동파로 분파된다.

초계 정씨의 경산 입향조는 시조의 10세손이며 고려 말 밀직제학을 역임하고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던 양헌공(良獻公) 정연(鄭珚)이다. 양헌공 정연은 고려 공민왕 때 역모에 연루되어 경산으로 유배온 것을 계기로 경산에서 은거하였다. 경산파는 다시 종파인 협석파(俠石派)를 비롯해 천동파(泉洞派)·옥곡파(玉谷派)·인각파(仁角派)·동계파(洞桂派)로 나뉜다. 사동마을의 초계 정씨들은 양헌공의 5세손인 정변함(鄭變咸)의 후손들로 천동파에 속한다.

이상에서처럼 사동마을은 옛 경산현의 주요 가문 가운데 세 동성집단이 세거한 동성마을이었다. 비록 저명 반촌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종회를 운영하면서 선영 관리, 재실 관리를 비롯하여 각종 위선활동을 전개하며 가문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사동마을 동성집단의 문중활동]

사동마을의 동성집단 중 가장 활발한 문중활동을 전개한 가문은 청주 한씨이다. 청주 한씨 6개 지파는 직장공 후손으로 구성된 ‘청주 한씨 직장공파 종회’라는 문회(門會) 중심으로 선영과 재실 관리 및 비석 건립을 비롯한 위선 사업과 동성원의 친목 도모, 그리고 후손을 대상으로 한 육영 사업을 전개해왔다.

마을 뒤편 대원산 기슭의 청주 한씨 입향조 묘소 옆에는 산천재(山泉齋)가 있는데, 300년 전 세워진 것을 1990년대 중반에 중건한 것이다. 산천재에서 후손들은 매년 한차례의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묘사 준비와 개항기 명유로 칭송받았던 갈헌(葛軒) 한동유(韓東愈)의 향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매년 말복에는 복달임을 행하고 있다.

문회의 재산은 사동마을 인근의 전답과 임야 등의 형태로 관리되었는데, 경산시의 택지개발사업 이후 받은 보상금을 현금화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같이 현금화된 문중 재산은 대부분 금융기관에 예치하였으며, 금융기관의 이자로 재실과 산소 관리와 묘사 등의 제사 및 기타 활동에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사동마을의 달성 서씨초계 정씨 문회도 청주 한씨와 유사한 동성활동을 전개하였다. 달성 서씨 냉정 종회는 입향조가 강학하던 곳에 후손 양성을 목적으로 재실을 건립하였으며, 위선활동과 성원의 친목 도모를 위한 문중활동을 지속하였다.

사동마을의 주요 동성집단 가운데 구성원이 가장 적은 초계 정씨 천동파 종친회는 양헌공의 재사인 이유재(履有齋)를 관리하면서 회원의 친목 도모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초계 정씨의 경우 이곳에 경산 입향조의 묘소가 소재한 관계로 사동에 거주하는 천동파보다 경산파 대종회격인 양헌공파와 경산파의 종파인 협석파가 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천동파의 경우 성원들이 대부분 도시화 및 산업화의 영향으로 이촌하여 대구·부산 등지 살고 있으며, 지역별로 형성된 종친회를 통한 문중활동을 전개 중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동마을에 세거한 동성집단은 정도와 규모에 있어 명문거족의 문중활동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동성집단 일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활동을 지속해왔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입향조 중심의 현조에 대한 선영 관리를 위해 족계를 결성하여 묘소의 석물과 재실을 건립하는 위선활동 그리고 학계의 결성과 서당 혹은 서원의 건립을 통해 후손을 양성하는 활동을 지속해온 것이다.

[도시화에 따른 문중활동의 지속과 변화]

현대 사회에서 동성집단은 그 형태와 운용의 조정을 통해 재활성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사동마을 동성집단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을의 해체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세 동성집단은 조직운영의 현대화를 모색하면서 예상되는 변화에 대처하였다.

이에 따라 세 동성집단은 불문율의 관행을 명문화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 성원 중심의 운용을 다수로 구성된 이사회 중심으로 변경하였다. 규약의 명문화는 개발사업에 포함된 공유재산의 보상에 따른 효율적인 협상과 절차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으며, 다수의 이사회 구성을 통한 조직 운용의 현대화는 개인에 의한 공유재산의 전용을 방지하고, 다양한 사업을 용이하게 전개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크게 증대되어 현금화된 공유재산의 안전한 관리와 적절한 처리를 위해서도 규약의 명문화가 필요하였다.

2000년대 무렵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세 동성집단에게 선영과 재실, 비석 등의 이전과 현금화된 공유재산의 관리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보상금은 대토(代土)의 구입과 선영의 이장, 재실의 보수와 중건 등 위선 사업에 우선적으로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건물을 구입하거나 금융기관에 예치하는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사동마을의 세 동성집단 가운데 두 동성집단은 처음부터 건물을 구입하여 세를 놓는 방식으로 자산 증식을 모색하였다. 나머지 한 동성집단은 공유재산을 줄곧 예치하여 관리해오다가 지난 2012년 남아 있는 종회 소유의 토지에 상가를 건립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각각의 동성집단이 재산 증식에 많은 관심을 부여하는 것은 이것이 종회의 유지와 문중활동의 전개에 필요하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동마을의 초계 정씨 동성집단은 현금화된 공유재산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종가에 지원함으로써 숭조상문(崇祖尙門)의 정신에 기초한 보종(補宗)을 실천하고 있다.

이상에서처럼 동성마을이 해체된 상황에서 동성조직 운용의 성패는 다양한 활동의 전개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유재산의 확보 및 증식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폭넓은 동성활동의 전개는 경제적 기반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유재산의 중요성이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보유한 공유재산의 정도가 동성집단의 위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전통적으로 동성집단의 공유재산이 문중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도시 지역의 동성조직에서는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도 동성집단 내 공유재산의 중요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현대 사회에서 동성조직의 결성과 운용에서 야기된 커다란 변화의 지표로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논의를 요한다. 이를테면 사동마을의 한 동성집단에서처럼 법인을 설립하여 공유재산을 증식하려는 노력을 동성집단이 이익집단화되는 지표로서 간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달성 서씨 문회가 개발과정에서 철거된 재실의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혈족 범위를 넘어서 동성집단의 명예를 높이려 한 점, 초계 정씨 문회에서 보종을 실천한 점, 그리고 청주 한씨 문회에서 후속 세대 양성에 주력한 점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향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사동마을로 대표되는 옛 경산 지역의 주요 동성집단 사례는 도시화가 동성조직의 와해와 문중활동의 위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과 유사한 상황에 처한 동성집단에서처럼 조직 운용의 현대화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지향하면서 사회적 변화에 조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몇몇 분야에서는 이전보다 왕성한 활동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명현이나 거유를 배출한 명문거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 세 가문의 사례는 현대 사회에서 종족 조직의 향배 예측과 유형 분류에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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